묵상자료 7861호(2022. 11. 24. 목요일).
시편 시 107:17-20.
찬송 51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몽골에서는 “비찬드 하이렉타이” 티베트에서는 “응아학교라 되기레”, 뉴질랜드의 마오리 족들은 “알로하”라고 합니다. 기원전 고대국가 수메르에서는 “키마랑에”, 그리고 고대 그리스어는 “세필로” 라고 하는데. 이렇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와 고대를 뛰어 넘어 지금까지도 이 말을 하면 행운이 따른다고 합니다. 우리말로는 뭘까요? 바로 “사랑해” 입니다. 매일 말하는 사람도 있고, 1년에 한 번도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 말을 하기가 쑥스러워서 못한다면 상대방에게 몽골말이나 고대 수메르 말을 수수께끼처럼 내고, 말뜻을 우리말로 하게 하면 어떨까요? 내가 사랑한다는 뜻도 전하고, 또 나를 사랑한다는 말도 들으니, 일석이조이겠지요. 그럼 제가 먼저 해 볼까요? “노날 가족 여러분 사랑합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7년 11월 24일 방송>
2. “금화의 비유(11-27절)”을 읽었습니다. 이 금화 비유는 이른바 예수님의 어록집이라고 일컫는 Q자료의 내용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에 공통으로 발견되는 말씀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공관복음서가 씌여지기 전에 마가복음서와 함께 예수님의 어록집이라는 문서가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설에서 생긴 학설인데, 이 두 문서를 토대로 공관복음서가 씌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 Q자료에 예수님의 수난이야기가 빠져있다는 것이 Q라는 장르로 분류하기 어렵다는 점이라고 합니다. 이 Q자료(예수 어록집)의 특징은 “예수께서 이르시되”라는 서론이 있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 귀족이 왕위를 받아오려고 먼 길을 떠나면서 자신의 종들에게 금화 한 개씩을 주면서 자신이 올 때까지 이 돈으로 장사하라고 맡기게 되고, 왕위를 받아 돌아온 귀족이 종들을 불러 결산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한 종은 금화 한 개로 열 개로 불렸다 보고하고, 또 다른 한 종은 두 개로 불렸다고 보고합니다. 그런데 평소에 주인의 성품이나 처세에 불만을 가진 한 종은 주인께 받은 금화를 수건에 싸서 보관했다가 그대로 가져왔다고 보고합니다. 그 연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충격적인 발언을 한 것입니다. 주인은 “엄한 사람/지독한 사람”으로, “맡기지 않은 것을 찾아가고, 심지도 않은 데서 거두시”는 분이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21절). 그러니까 자신의 주인은 맡기지 않은 것을 우겨서 빼앗아가고, 씨를 뿌리지도 않고 추수하려는 사람으로, 그런 사람을 위해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자신들에게 돌아올 것이란 없을 것을 알고, 수건에 싸서 보관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1세기 근동 아시아에서는 이런 악덕 귀족들이 있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맡은 금화를 가지고 사업을 했다가 손실을 보게 될 경우에 그 변상액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생긴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어느 시대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사회 경험이 부족한 촌부라거나 독불장군처럼 살아온 삶의 이력 때문이라면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오히려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이나 심지어 목사라는 사람들 중에도, 빈 말을 일삼거나 약속한 시간 안 지키기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을 보면, 어안이 벙벙해 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고쳐볼 생각을 하는 것은 바보짓일지 모릅니다. 상종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싶을 때가 많다는 말입니다. 이 주인에 대한 표현 αυστηρος(아우스테로스)는 “엄한 사람, 지독한 사람”이외에 “가혹한 사람”이라는 번역이 될 수 있으니, 이 종이 알고 있는 주인은 “가혹한 사람” 군(群)에 해당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한 주인을 두고 다른 종들과는 상반되는 이해를 할 수도 있음 역시 피할 수 없는 세상 정황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살아온 불행한 사람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역 발상이 섬광처럼 스쳐지나갑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계에는 신선한 바람과 함께 토네이도 급의 돌풍까지 불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한복판에는 마치 17-19세기 가난하고 척박한 땅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휩쓸었던 기독교 제국주의가 그 본색을 들어낸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왕의 직함을 얻어낸 귀족처럼, 열악한 일반 사람들의 눈에 “엄한 사람, 지독한 사람”을 넘어서 “가혹한 사람”으로 비춰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입니다.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사람답게 살도록 섬기는 일에 목표를 세우신 예수님의 정신과는 다르게, 세상을 정복하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지배자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현대판 기독교회 말입니다. 최근 미국 어느 유명 신학교 총장이 10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아프리카계 흑인 조너선 월턴 박사에게 물려주게 되었는데, 설교는 “기독교회는 파라다이스가 아니다.”라고 외쳐왔고, 흑인과 백인은 공존할 수 없다며 신학생 지망 아프리카 흑인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냈던 새무엘 밀러 채플의 이름을 떼 버렸다고 하지만, 그분의 삶은 서울 최고급 호텔에서 여장을 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가혹한 지도자”로 비춰질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금할 수 없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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