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60호(2022. 11. 23. 수요일).
시편 시 107:13-16.
찬송 50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손에 다섯 개 손가락은 모두 나름의 특징이 있고 이름이 있지요. 그런데 엄지로부터 네 번째 손가락은 무명지, 즉 이름이 없는 손가락이라고 불립니다. 딱히 이름을 붙일만한 게 없을 정도로 별로 쓸모가 없다고 하는데요. 옛날 맹자 선생이 살아 계실 적에, 이 무명지가 꼬부라져서 잘 펴지지 않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무명지가 그렇게 됐다고 해서 아픔을 느끼거나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남들과는 다른 무명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 늘 마음에 걸려서, 그는 어디든 용한 의원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면, 먼 길을 마다않고 찾아 다녔다고 하는데요. 그 얘기를 들은 맹자가 이런 말씀을 했다고 하지요.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면 그렇게 싫어할 줄 알면서, 마음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으면 왜 싫어할 줄 모르는 것인가?” 수천 년전 맹자의 시대와 지금 우리의 모습이 별로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모두 같을 순 없겠지만, 서로 맞춰보려는 노력은 필요하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년 11월 23일 방송>
2. “예수와 삭게오(1-10절)”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성경을 읽을 때 하찮은 것들에 눈과 귀가 끌려 정작 중요한 것들을 흘려버리거나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어쩌면 여러분도 그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세리장 삭게오 이야기는 주일 학생이던 시절부터 아주 자주 그리고 인상 깊게 들었던 말씀입니다. 그때마다 높은 관리에 부자인 삭게오가 그 뚱뚱한 몸으로 뽕나무로 올라가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상상하였습니다. 다행히 1983년 장신대의 구약 교수와 함께 성지 순례를 하였을 때, 여리고에서 그 뽕나무를 직관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뽕나무와 달랐으며 뚱보가 올라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안내를 하던 유대인은 익살스럽게 웃으며, 구약에 언급되지 않은 사건들은 아무 데나 점을 찍어도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신약의 사건들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삭게오는 분명 남다른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주님의 현명한 말씀이나 능력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내적인 갈급함과 갈등이 주님을 찾아 나서게 하였고, 마침내 뽕나무 위로 오르는 일까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 자신의 정체가 들통 난 것입니다. “삭게오야, 내려오거라. 오늘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그렇게 해서 갑작스럽게 주님을 모실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삭게오의 첫 반응은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그리고 남을 속인 일이 있다면 네 갑절을 갚아주겠습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은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고 삭게오를 찾은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삭게오라는 사람의 내면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가 무엇 때문에 뽕나무에 올라갔는가 하는 그의 마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리장인 삭게오는 비교적 정직하고 합리적인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해진 월급만으로 그렇게 부자가 되었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겠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직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혹시나 부정한 수입을 착복했을 것을 인정하고 네 배나 갚겠다는 말도 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삭게오의 중심을 살필 수 있습니다. 그를 오랫동안 잠 못 이루게 하고 불안하게 하던 문제들이 일순에 사라지는 그런 느낌을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결산이라고 할 주제, 구원의 확신과 기쁨이 솟구친 것입니다. 첫째는 나눔의 행복이었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수고의 열매라고 생각했던 재물이, 사실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눔이 가장 잘 사는 일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둘째는 회개의 열매를 정산하는 감격이었습니다. 회개는 잘못에 대한 뉘우침과 뒤이은 변화된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억울함과 고통을 짊어졌을 사람들이 보상받아야 된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셋째는 아브라함의 자손 됨을 인정받은 기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표상이 되는데, 삭게오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의롭고 확실한 믿음에 이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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