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24(2023. 8. 14. 월요일).

시편 시 10:16-18.

찬송 4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조는 모윤숙과 노천명의 뒤를 잇는 여류시인입니다. 이름에서 느껴지는 조금은 중성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김남조의 시는 지극히 여성스럽고 고운 시인 특유의 시어들을 담고 있지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김남조는 더없이 섬세한 감정과 고운 언어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평가 받고 있습니다. <편지>, <너를 위하여> 같은 작품은, 사랑의 마음을 키워가는 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암송되곤 하지요. 붙이지 못하는 편지를 밤새 썼던 기억이 있는 분이나, 가슴속에 잊지 못하는 이름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면서 말입니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그의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그대만큼 나를 정직하게 해 준 이가 없었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그대 깊이를 다 지나가면 글썽이는 눈매에 내가 있다. 나의 시작이다.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 한 구절 쓰면 한 구절 와서 읽는 그대.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붙이지 않는다.”

    한창 사랑에 몰입해 있을 때는, 시나 노래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내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잠 못 이루는 밤, 이 시 <편지>를 읽으며,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눈물을 흘렸을 수많은 이들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요. 사랑의 마음을 담은 시들은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지요. 남도 이해하지 못하는 마음을 이해받는 듯도 하고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가슴 두근거렸던 바로 그 시간 속으로, 한 순간 되돌아가게 만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 때 편지를 받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문득 지난 이들의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김남조 시, 한지영 곡, <편지>였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814일 방송>

 

2. “세례 요한의 죽음(14-29)”을 읽었습니다. 지난 달 초에 저의 두 번째 목회지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교우가 별세를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외항선원으로 오랜 세월을 살다가 가족에게로 돌아와 행복하게 사신 분입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평범한 통과의례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우리 인간들은 대단한 의미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건강한 먹거리와 의술의 발달로 수명이 엄청나게 길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아쉬워하고 슬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단 한번 뿐인 삶이라 생각하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나 내세를 믿는 신앙인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당연히 죽음을 초연히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에 대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습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23:28). 오직 누가복음서만이 주님의 죽음에 직면한 여인들의 슬픔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부활의 주인이 되신 주님까지도 죽음을 슬퍼하라 말씀하신 것은, 여러 의미가 담겨있다 하겠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별의 아픔과 함께 새로운 단계로의 변화라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처럼 육신의 부활을 예상합니다. 천사의 나팔 소리에 모두가 자신의 무덤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대표적인 한 신앙인의 죽음을 주목하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는 우리 주님의 전령으로 6개월 앞서 세상에 와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분입니다. 세례라는 제도는 이미 에세네 파에서 시행하던 제도로, 주전 3세기 말부터 형성 주후 1세기에 소멸된 유대 경건주의 운동의(핫시딤 운동) 일원인 에세네파에 입교하려는 사람들에게 시행하던 제도였습니다. 흔히들 쿰란 공동체와도 연계하려 하지만 정확한 근거는 없다 합니다. 아무튼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의 영향을 받았을 것은 충분히 고려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당시의 허수아비 왕 헤롯이 저지른 수많은 잘못 중에서도 자기 친 동생의 부인(제수) 헤로디아를 아내로 삼은 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였고, 그 때문에 속앓이를 하던 헤롯이 헤로디아 소생 살로메의 춤에 빠져 그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명목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 것입니다. 비록 실세인 빌라도 총독과는 전혀 다른 허수아비일지라도 헤롯은 자신의 콤플렉스를 세례 요한에게 풀었다는 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헤롯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맞이하는 부활신앙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신앙은 자발적으로 죽음의 길로 달려갈 용기를 주었던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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