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17호(2025. 9. 10. 화요일).
시편 80:13-17.
찬송 5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빅터 플랭클은 아이슈비츄 수용소에서의 죄수들의 심리를 세 단계로 분류하는데, 두 번째 단계는 수용소 생활로 무감동의 단계라고 이름 붙인다. 간밤에 생긴 고열/高熱을 보고하지 않았다며 이튿날 일터로 떠나기 전 집합시간에 중인환시 속에서 그 고열 환자를 때리고 또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는 것을, 그 장면을 피하지 않고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무관심 무감각으로 말없이 지켜볼 뿐이다. 감각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2. “야고보는 죽고, 베드로는 갇히고(1-5절)”과 “감옥에서 풀려난 베드로(6-17절)”을 읽었습니다. 대학 동창들의 단톡방에는 회원은 몇 안 되는데, 각종 글들이 올라와서 읽게 되는데, 다양한 얘기들이 눈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들을 읽으며 아직도 우리는 이런 세상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곤 합니다. 교회에 초빙된 강사 목사님이 자신의 말에 무조건 아멘으로 응답하라는 억지소리를 듣던 생각이 나서 피식 웃었습니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지당한 말들이지만, 가나안 성도들의 비웃음처럼 도무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강요하는 말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디 댓글을 남겼습니다. 아직까지 반응이 없는 것을 보니까 단단히 벼르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혜의 왕이 솔로몬이니까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면 지혜로운 아들이 되는 겁니까? 솔로몬이 자라면서 배우고 견디고 힘들어했을 과정들은 아예 살피려 하지도 않고, 공짜로 지혜를 내 놓으라는 70년대 전국복음화 운동식 배 째라 신앙이었습니다. 기도나 설교야 어찌됐건, 그래도 하나님의 은총에 맡기는 수준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하나님 책임론은 아직까지도 건재합니다. 아무런 수고도 없이 모든 잘못은 하나님께 떠넘기고 책임까지 지라는 식은 삼척동자라도 웃을 일이며, 그렇게 해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을 지근거리에서 따라다녔던 사도 요한의 형 야고보가 헤롯왕에 의해서 목이 잘려 순교했다는 것과 베드로 사도까지 붙잡혀서 4인 1조로 구성된 경비병 4개 팀이 옥을 지키게 하고, 과월절이 지나면 백성들 앞에 끌어내어 죽일 계획이었다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과월절을 지키러 수 십 나라에서 예루살렘 순례에 참가하는 사람들이 하루에 3천명이나 세례를 받는 엄청난 새 역사/歷史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시련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왕으로써 실권도 없는 헤롯은 어찌하여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 요즘 우리 축구계는 혹한의 냉기류가 불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정몽규 축구형회장이 회장 연임 10년 동안 후원금으로 3천만 원을 내어놓고, 매년 정부에서 나오는 400여억 원의 지원금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르는 비리를 저질렀다 합니다. 그 중에는 구설수에 오른 현 축구감독의 선임에도 깊이 간여했다 해서, 이번 팔레스타인과의 대표 팀 축구대회에서 무승부를 이루었으니, 난리 난리 이런 난리도 없다 합니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의 라커룸에서는 감독의 화풀이가 도를 넘었다고 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주 비슷한 실례가 될까 해서 인용해 보았습니다. 존경과 권위를 상징하는 지도력을 상실한 지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억지와 생떼를 부리는 일 외에는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헤롯왕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장 힘이 없고 무력한 사람들을 향해서 화풀이를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야고보와 베드로였습니다. 야고보 형제는 일찍이 주님의 양 옆자리를 탐하다가, 예수님이 마실 잔(십자가)을 마시겠노라고 약속하였으니, 말 값을 치렀다 하겠고, 베드로는 유대 교 당국자들의 고민거리를 자신이 치워주겠다는 정치적 술수였다고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야고보의 순교는 대의명분이 약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열 두 사도 중에서 최초로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길은 의미가 크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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