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18(2025. 9. 11. 수요일).

시편 80:18-19.

찬송 3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명나라 사람 진익상/陳益祥이 그의 책 <잠영록/潛潁錄>에서 말했다. “사람이 늙은이 입장에서 젊은이를 보고, 죽음을 통해 삶을 보며, 실패를 바탕으로 성공을 보고, 시들어 초췌함으로부터 영화로움을 본다면 성품이 안정되고 행동이 절로 바르게 되리라.” 모든 삶의 가치는 역지사지에서 바라볼 때 얻을 수 있다 하겠다.

 

2. “헤롯의 죽음(20-25)”을 읽었습니다. <오징어 게임><기생충>이 한류 영화를 견인하는데 한 몫을 했다 합니다. 헐리우드 영화에 길들어 있던 서양 사람들이 어떻게 반지하에서 콩 볶듯 하루에도 바람 잘 날 없는 한국 영화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부 영화로 대표되는 인디언들과 말을 탄 기수들, 그리고 이른바 저격수에 의해서 전쟁의 판도를 바꾸는 역동적인 서양 영화들에게서 신물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를 듣기도 합니다. 열대야가 한 달 이상 계속되는 동안에 그래도 도움이 된 것이 있다면, 서양 영화를 정주행/正走行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출생의 비밀 아니면 모범생 출세기란 도식의 우리 영화를 비교할 기회를 가진 것입니다. 물론 서양 영화중에서도 등장인물의 심리 묘사에 공을 들인 수작/秀作들이 없지 않지만 말입니다. 생명 경시와, 물질만능의 풍조가 판을 치는 스토리는 우리들 인간의 삶의 의미와 목적을 상실하기 안성맞춤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보편적인 공식이긴 하지만, 우리 방화/邦畫의 흐름은 내면의 변화와 갈등을 잘 보여줌으로, 인간의 삶에서 공감대를 나눌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성공요인을 찾는 것 같습니다. 오늘 34도의 늦더위 속에서 감상한 <일급살인/The Murder in the First>은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떠올리게 한 수작이라 하겠습니다.

    헤롯은 세례자 요한의 목을 자른 장본인으로, 그리고 사도들 중에서 첫 번째 순교자가 된 야고보의 살해로 악명 높은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런 살인 행위는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벨 때는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고, 야고보의 살해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악행을 하는 사람들의 최후에 대해서 궁금해 할 때가 있습니다. 인류의 심판대에서는 물론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악행인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헤롯의 죽음에 대해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방인의 땅 두로와 시돈 사람들은 헤롯의 영토에서 나는 식량을 공급받고 있는 처지인데도 헤롯 눈에는 거슬리는 일이 많아 헤롯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합니다. 그래서 그 이방나라 백성들은 헤롯과 좋은 관계를 갖고자 헤롯의 침소를 담당하는 관리 블라스토를 매수해서 헤롯에게 간청을 넣었던 모양입니다. 그때 헤롯은 아첨하는 이방나라 백성들을 비롯해서 유다인들 앞에서 자신이 능력과 권위를 갖춘 왕임을 자랑하는 연설을 하게 되었을 때,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신에게 돌리는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벌레에 먹혀서 죽게 된 것입니다. 무서운 땅벌에 쏘여서 죽을 수도 있고, 살인 진드기에 물려 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벌레에 먹혀버리는 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차제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복된 죽음을 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해서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연약한 이들을 위해서 그리고 조국과 대의명분을 위해서 죽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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