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40(2024. 10. 3. 목요일).

시편 85:12-13.

찬송 53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 출생. 여류작가, 시인, 수필가, 사회사업가, 비행사인 앤 머로 린드버그는, 1935년 초기의 비행체험을 기록한 여러 권의 책을 냈다. 그녀의 명언 가운데 이런 말이 있다. “매화가 용기를 상징하는 것은 눈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매화는 진정한 용가 무엇인지를 아는 꽃나무이다.” 차가운 눈 속이라는 현실을 알면서도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매화처럼, 시련과 역경을 뻔히 내다보면서도 그 길을 달려갈 수 있는 것은 신앙적으로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 용기 있는 멋진 삶이다.

 

2. “스게와의 아들들(11-20)”을 읽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종교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종교가 그 순기능을 잃어버리고 오히려 역기능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의 순 기능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역기능이란 무엇입니까? 우선 순기능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온갖 속임수와 불륜 그리고 불법을 교묘히 부추기고 장려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높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기 위해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힘쓰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런 목표를 위해서 영원한 삶과 권선징악을 강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연히 역기능이란 그동안 유물론자들이 주장해 온 거짓된 교리를 내세워서 사람들을 더욱 더 힘든 수렁으로 빠트리는 일인데, 여기에는 마술이나 눈 속임 같은 사술/邪術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명한 잘못을 확인하면서도 이런 사람을 지도자라고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령 2006년도 말에는 금이빨 사역을 성령의 역사로 보자는 주장이 통합 총회장을 지낸 류 아무개 목사에 의해 강조되기도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확인할 수 없으니까 이빨의 변화로 알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면서 성령의 사역을 거부하거나 제한하지 말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사교적인 주장을 하게 된 것일까요? 전도에서 이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 주님이나 사도행전 교회는 귀신에 붙잡힌 사람을 온전하게 제자리에 돌려놓거나, 치유하는 사역을 하였는데, 이것은 육신의 치유를 통해서 영혼의 치유에 이르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음이 분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치유사역의 목표는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을 예수께로 집중하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지금도 이런 목표를 위해서 치유사역에 올인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역의 위험은 목적과 수단이 전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입니다. 에베소에는 이런 치유사역에 올인 하는 유대지도자들이 있었다 지적합니다. 바로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마귀를 쫓아내는 소위 엑스타시/Ecstacy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사례들은 우리 주변에 매우 흔하다는 게 문제 중의 문제입니다. 신학교 기숙사에서 남녀 학생들 가운데 소위 삼각관계 치정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 여학생과 한 남학생 사이에 벌어진 일인데, 여학생 중 한 사람이 며칠간 금식으로 맞선 것입니다. 급기야 그 학생은 환상을 보게 되고 완전 미친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기숙사 3층에 있는 그 여학생 방으로 창문을 뜯고 들어가서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마침내 엑스타시 현상에 관심을 가진 몇 학생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팔과 다리를 붙잡고 눈과 가슴 등을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거의 죽음에 이르자 학교 담당자는 강제로 학생들을 떼어 놓아 더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선교지에서 만난 한 여자 청년도 그런 경우였다고 합니다.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많이 맞아서 쇠약해졌을 때 제가 방문했고, 저는 모여온 교우들과 함께 그 청년을 괴롭히는 모든 악한 세력들이 물러나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3개월이 지난 다음 선교활동 때 안부를 물었더니 지금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미개한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런 정신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금이빨 사건이나 치유를 빌미로 환자를 죽을 만큼 두들겨 패는 전근대적인 악습을 철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 한국 교회에서는 안찰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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