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3974호(2012. 4. 3. 화요일).
시편 139:4-6.
찬송 29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린 딱따구리 한 마리가 이제 막 나무에 구멍 뚫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신이 나서 혼자 직접 나무를 쪼아보기로 했지요. 그런데 첫 번째 시도에서 벌써 나무 조각이 부서져 나갑니다. 어린 딱따구리는 의기양양해져서 더 큰 나무를 쪼아봅니다. 그러자 이번엔 그 큰 나무가 아예 산산조각이 나버립니다. 그 어린 딱따구리는 완전히 거만해진 말투로, 혼자 말을 하지요. “겨우 두 번 만에 이렇게 대단하게 해내다니.” 나무 조각이 부서진 거나 아예 산산조각이 난 게, 다 바로 그 순간에 떨어져 내린 벼락 탓이었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코끼리와 생쥐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날 둘이서 계곡에 걸쳐져 있는 나무다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생쥐가 첫발을 내 딛는 순간, 우지끈 소리가 나면서 나무다리가 갈라집니다. 그러자 생쥐는 돌아서면서 말합니다. “나 때문에 다리가 무너져 내릴 것 같으니 돌아가자.” 이 동물 우화는 들으면 그 어리석음이나 어이없음을 금세 느껴지지요. 사람이라면 실제로 그럴까 싶은 우화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기 빗댈만한 상황이 우리에게 흔하니, 우화가 생긴 거겠지요. 딱따구리나 생쥐 우화도, 내 능력과는 상관없는 성과를 다 내 능력 덕분이라고 모두 다 내가 뛰어나서라고 착각하거나 과신하는 일이 실제로 많으니, 생겼을 겁니다.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루오는 20세기에는 드문 종교화가입니다. 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미 그림에 소질을 보였지요. 하지만 가난 때문에 미술 공부 대신, 열네 살 때부터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에 들어가 일을 배워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열아홉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면서, 그의 특출한 재능과 집념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습니다. 화가가 된 이후로는 당시의 화풍이나 유행에 전혀 개의치 않고, 종교적인 그림에 몰두했지요. 그래서인지 그의 말에서도 종교적인 색채가 풍겨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그를 종교 화가로써 가장 잘 나타내 주는 말이,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나는 망망대해에 미미한 먼지, 바람에 씻기우는 가련한 선원, 어두운 암흑에서조차 성스러운 평화와 빛을 사랑하노니.”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3월 5일 방송>a.
2.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것 하나만 해결한다고 해도 엄청난 문제를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심이 그것 입 니다. 시기심이란 다른 사람이 수고해서 얻게 된 정당한 명예나 권리를 부러워한 나머지 미움으로 발전한 경우를 말합니다. 이웃집 아들이 좋은 대학에 합격했을 경우에 생길 수 있는 마음이고, 질투심이란 다른 사람의 소유나 권리를 빼앗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친구의 예쁜 아내를 넘볼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이런 시기와 질투심은 우리들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나타나게 되는데, 그 결과 슬프고 잘못된 문제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문제가 종교가들의 마음속에 있었음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출현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고, 급기야는 시기와 질투심으로 불타듯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나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정상적이었다면, 그들은 시기와 질투심이 아니라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했어야 옳았습니다. 자신들이 힘써 가르치는 신앙지도에 좋은 동지가 나타났다고 생각했어야 옳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기했습니다.
이런 시기와 질투심을 가진 사람들이 하는 짓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 미움의 대상들을 헐뜯고 힘들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저런 구실을 찾아내어 망신을 주거나 말의 올무에 걸려들게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본문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은 “권세의 주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가진 권세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돈으로 제사장직을 살 수가 있었고, 매우 흔한 현상이었습니다. 종교가 부패할 때 나타나는 분명한 현상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그런 질문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의 근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점을 그들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권세가 하늘로서 온 것인지 사람들에게서 사온 것인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권세가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것일까? 아니면 사람들에게서 사온 것일까?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소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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