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03(2012. 8. 10. 금요일).

시편 25:1-3.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순자가 학문을 하면 사람이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짐승 이라고 까지 말했던 이유는, 사람은 배우지 않으면 악한 습성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성악설>에 뿌리를 둔 교육관은 상식이 돼서 꽤 오랫동안 동서양을 지배했는데요. 여기에 전면적으로 반기를 들고 나타난 사상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학문과 예술의 발달은 인간의 도덕성을 타락시켜왔다.” 라고 논증하면서, 당대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지요. 바로 장 자크 루소입니다. 그에게 사회는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장소였고, 각종 제도는 인간의 영혼을 병들게 만들고 얽매는 사슬이었습니다. 다른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새로운 제도와 개혁을 통해서 인간을 계몽시키려했을 때, 루소는 이렇게 주장한 겁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 루소는 이런 사상을 바탕으로 1726년에 [에밀]을 발표했는데요. 에밀이라는 이름을 가진 어린이가 출생해서 25년에 걸쳐 받는 새로운 교육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에밀]은 프랑스 사회에 선풍적이 인기를 끌어서 육아의 교과서로 삼을 정도였는데요. 그 영향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이전에는 유모에게 수유를 시켰던 상류사회의 귀부인들이, [에밀]을 읽고 난 후에는 직접 수유를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에밀]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교육이란 기존의 가치관이나 지식에 물들지 않은 무렵의 소년 소녀의 자유와 그 자연성에 바탕을 두어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뭐 이런 루소의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요. 하지만 그에게는 치명적인 모순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자녀들 5명 모두 고아원에 보냈다는 거지요. 이런 사실은 루소가 얼마나 비도덕적이고 무책임한지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지만요. 당시 파리에서는 공립 고아원에 자녀를 맡기는 풍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가난해서 못 먹이고 못 가르칠 바에는 가톨릭 교단에서 후원하는 고아원에 보내서의식주와 교육문제까지 해결하자는 생각에서였지요. 이런 풍조는 1760년대까지도 이어져서요. 신생아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아이들이 고아원에서 자라게 됩니다. 하지만 상황이 아무리 그랬을 지라도, 부모로써의 죄책감은 피하기 힘들었겠지요. [에밀]은 바로 이런 반성과 자책에서 탄생했습니다. 루소는 [에밀]에 이런 글을 썼어요. “아버지의 의무를 다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될 권리도 없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스스로 키우고 교육시켜야 한다. 가난 일 현실 등이 그런 의무를 면제해주지 않는다. 그런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오랫동안 회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그 고통은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 그의 뼈아픈 회한을 담은 글에서 어느 시대나 다를 것 없을 부모의 자화상이 보입니다. 그는 그렇게 위대한 사상가 이전에,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54일 방송>

 

2. 가룟인 유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가끔 고민되는 주제입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로, 재정을 맡아서 수고했으나 나중에는 자신의 스승을 배신하고 은 30량에 팔아버리고, 그 돈을 단 한 푼도 써 보지 못하고 다시 갖다 준 후에는 나무에 목을 매 숨진 사람입니다. 그를 동정하는 까닭은 그가 우리 인류를 대표한 행동,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서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비난의 소리를 듣는 주인공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며 배신자라고. 그러나 그가 한 일은 어쩌면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며 누군가는 짊어져야 할 악역이었다고 말입니다.

생뚱맞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주변에는 이런 악역 전담자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라는 존재가 그렇지요. 전후 사정도 모르고 아내의 요청에 따라서 자녀들을 혼내주는 일을 도맡기도 하는 때문이며, 권력자 주변에서 아첨하며 권력자를 격려해 주는 이들도 그런 류의 사람입니다. 악덕 상인이나 부도덕한 공무원도 그렇습니다그들 때문에 인생은 어떤 길이 바르고 옳은 길인지 도덕 강의가 필요해 진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역할을 하지 않기를 희망할 뿐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결과야 어떻든 이런 악역 담당자들이 넘치고 넘치는 세상이 아닙니까?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한 이유에서, 그런 위험한 일에 온 몸을 내던지는 것 같습니다.

   소탐대실이며, 눈앞만 볼 뿐 멀리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악역이지만 훌륭하게 소화해서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면 상을 주는 것은 또 무슨 연유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필요한 이유이고, 그 심판이 궁금해지는 이유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의 판단과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말입니다. 어떤 로마 가톨릭 대주교님이 말했다지요. 천국에 가 보니까 와야 할 사람은 안 보이고, 오지 말아야 할 것들로 가득 차 있더라고 말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판단과 다른 세상이라는 뜻으로 들렸습니다.

 

3. 호치민 공항에서 새벽 1시 출발이어서 스마트폰으로 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게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가운데 건강하게 돌아왔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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