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100(2012. 8. 7. 화요일).

시편 24:1-2.

찬송 45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죽음조차도 낭만적이었습니다. 장미를 좋아했고, 그 좋아하는 장미를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고 싶어서 장미를 꺾다 가시에 찔려 죽었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그의 묘비명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고 하지요. “장미여오 순수한 모순이여기쁨이여그 많은 눈꺼풀 아래 그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이여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릴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장미가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안타깝게도 오랫동안 백혈병을 앓고 있었거든요하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일지도요. 가슴에 박혀 버린 가시는 언제든 영혼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어려운 것을 극복해야 자신의 고요함을 지닐 수 있다고, 고독한 것은 어렵기 때문에 좋은 것이라고 말했던 릴케는, 만년에 역작이라고 불리는 <두 위로의 비가>에서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행여 내 울부짖음들/ 뉘라 천사들의 계열에서 날 들으리/ 하물며 어느 천사가 있어/ 불현듯 나를 가슴에 안아 준다고 한들/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나 스러지고 말텐데/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그의 가슴에 박혀버린 가시가 정말 절절하게 느껴집니다. 가슴에 박혀버려서 빼지 못하는 가시를 안고 사는 사람이 어디 릴케뿐이었을까요. 위대한 시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가슴에도 가시는 다 박혀 있고우리는 그저 가시에 저항할 뿐입니다. 아프기만 한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고 필요냐 싶었을 때, 신 현님의 너무 [매혹적은 현대 미술]에서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안드레우스 슬로민스키의 작품을 보면파괴 새장에 새가 없고금고에 돈이 없고 박스에 아무 것도 없다. 끝에 아무것도 없는 줄 알면서 계속 망치를 두드리는 작업바로 이 무모한 작업이 예술이며 인생이 아닐까? 다 버리고 죽음을 얻는 사람의 인생그 무모한 작업이 매력이 있는 건,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재미 때문이리라. 세상에서 가장 이상하고 신비한 골동품이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자신이라는 말이 있듯이. 자아의 신비를 알기 위해 그 무엇이든 다 버려도 괜찮을 것이다. 결국 인생이 무엇인가를 아는 깊은 깨달음일 테니까.” 그리고 김형연 작가의 오래 전 단편 소설 <>에 나왔던 이 구절도가시 때문에 아플 땐 큰 위안이 되어 줍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말하면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분노와 슬픔의 감정만은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분노는 버팅기는 힘을슬픔은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511일 방송>

 

2. 저에게 신학을 가르치신 한 교수님이 몇 해 옥살이를 하시다가 풀려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환영만찬을 만들었습니다. 감방살이가 시작되기 전 단계가 무척 힘드셨다고 하셨습니다. 언행이 부도덕하고 비인간적인 깡패수준의 취조관을 만나야 하는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상스러운 욕설과, 온갖 저질로 뭉쳐진 태도, 제 마음대로 발길질하고 침을 뱉는 등, 참 견디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르게 주님, 죽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새어나오고 있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저런 사람들이 출세 가도를 달려가도록 보고만 계실까? 어떻게 참된 자유와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개처럼 대접을 받도록 내버려두실까? 하나님의 심판이 반드시 있어야 할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당시 종교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굴욕적인 모습인데, 지금도 달라지지 않은 이 세상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거룩을 가장한 교회 지도자들의 모임에서는, 여전히 이런 비열하고 저질스러운 작태들이 태연히 재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이들은 지금도 출세나 성공을 위해서라면, 이해득실을 위해서라면 부끄러움을 모르고 소리를 쳐대고 있습니다. 순수성과는 거리가 멀고, 말씀의 정신과는 한참 빗나간 설교들이 한국의 교회를 혼잡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한 복판에 저 같은 어줍짢은 목사들이 여전히 입술을 꼭 다물고 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도도한 물결에 휩싸여서 흘러가는 모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자랑스럽던 이들도, 처음에는 순수함과 소명감에 불탔을 것입니다만, 오랜 침묵으로 현실에 적응해 가느라, 아주 천천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변해갔을 것입니다.

 

3. 제가 묵는 여인숙에는 작은 도마뱀들이 많습니다. 가끔 높은 천장에서 다이빙을 할 때가 있는데, 잠결에 제 얼굴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낯선 곳을 찾은 이방인을 환영하는 방법일까요?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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