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206호(2012. 11. 21. 수요일).
시편 49:16-20.
찬송 50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자연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이 [팡세]에 썼던 유명한 글귀이지요. 앞줄에 나오는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는, 성서에 나오는 상한 갈대에서 유래합니다. 이사야서 42장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지요.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것은 바벨론에 끌려가서 고통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구세주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뒤집으면 극심한 육체적 영적 고통에 놓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상한 갈대 그리고 꺼져가는 등불에 비유한 겁니다. 파스칼이 말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란 상한 갈대입니다. 더 강한 자에게 붙잡혀서,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비참하고 힘이 없는 존재. 그러나 중요한 구절은 다음이지요.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태생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존재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명언입니다. 그런데 파스칼은 정말 갈대를 보고 갈대라고 했을까요? 혹시 억새를 갈대라고 한 건 아닐까요? 파스칼이 살았던 클레르몽페랑은 프랑스 남부의 산악지대였기 때문에 갈대보다 억새를 더 쉽게 볼 수 있었을 겁니다. 또 실제로 억새가 갈대보다 연약하고 가냘프기도 하고요. 오히잠의 [한라산 편지]에는 억새와 갈대를 구별하는 법이 나옵니다. “억새와 갈대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사는 곳이 다릅니다. 억새는 거친 들판에 마른 땅이나 습지를 가리지 않고 아무 데서나 자라지만, 갈대는 물속에서 자랍니다. 제주도의 들녘을 물들이는 것은 모두 억새이고, 갈대는 성산포 터진목처럼, 물과 바다가 합쳐지는 늪지에서 자랍니다.” 거친 환경 속에서도 사나운 바람에 휩쓸리며 삶을 견디는 억새의 미덕은 이 땅에 발붙이며 민초들의 고되었던 삶의 내력과 닿아 있습니다.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자, 동시에 위대한 존재. 사실은 갈대라고 해도 억새라고 해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갈대보다 억새를 더 쉽게 볼 수 있으니까 억새라고 하면 더 와 닿을 것도 같네요. “인간은 생각하는 억새다.” 가을바람이 불기시작하면 억새의 깃털처럼 은빛 꽃이 피어나고, 온몸으로 바람에 부대끼고 흐느끼고 흩날립니다. 그러면서 씨앗들을 멀리멀리 떠나보내지요. 올 가을 그 어느 날인가는 그렇게 깊이깊이 사유하는 존재가 되어도 좋을 듯합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년 9월 20일 방송>
2. 말라기서는 바벨론 포로 후 약 100년이 지난 다음의 이스라엘의 사회상을 보여줄 뿐 아니라, 신구약 중간기의 영적인 풍토를 암시하는 바가 많다고 얘기하는 학자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비교할 때, 연결고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일 것입니다. 이런 의문을 바르게 풀지 못한 때문에 문선명과 같은 아류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구약시대, 신약시대 그리고 성약시대라는 이상스러운 분류를 합니다. 그러면서 성약시대의 근거를 고전 13:9-12을 듭니다. 지금이 바로 약속을 이루는 시대(成約) 곧 문선명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신구약 중간기라는 약 400년이 변수가 되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생긴 결과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이 다르다고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 배경이 된 것입니다. 말라기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하는 경고의 말씀입니다(1절). 그런데 그 경고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행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2-5절).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문을 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까?”(2절) 하고 엇박자를 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호기 좋게 큰 소리까지 칩니다. “우리 하는 일을 사사건건 훼방이나 놓고 무너트리시지만, 반드시 일으켜 세우고 말 것입니다.”(4절). 마치 오늘의 우리들과 아무 많이 닮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6-14절은 이런 당당한 이스라엘을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그들이 어떻게 큰 죄악 속에 살고 있는지를 고발합니다. 차마 입 밖으로 말하기조차 부끄러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도 우리와 아주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점이나, 하나님께 더러운 떡을 드리는 일, 형식만 남아 있는 신앙생활의 전형(全形)을 보는 것 같습니다. 진정성이 없는 신앙생활, 한낱 정신적인 취미나 위안 정도로 강등된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 오늘의 묵상입니다.
3. 어제는 김장 배추와 무를 밭에서 거두고, 때늦은 마늘을 심었습니다. 수고도 하지 않고 거두는 수확에 많이 죄송했습니다. 그러나 농사는 3년 중 최고였으나, 기대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기쁨과 감사로 가득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신교회 다움을 잃어버린 한국 교회의 과제. / 말 3:1-12. (0) | 2019.05.14 |
---|---|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묵상할 사항들. / 말 2:1-16. (0) | 2019.05.14 |
하박국의 찬양. / 합 3:1-10. (0) | 2019.05.14 |
하나님을 믿는다 함이란. / 합 2:1-20. (0) | 2019.05.14 |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려면. / 엘 3:9-17. (0) | 2019.0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