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659호(2019. 8. 10. 토요일).
시편 29:8-9.
찬송 41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올 봄에는 저 새 같은 놈, 저 나무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봄비가 내리고 먼 산에 진달래가 만발하면, 벗이여! 이제 나를 욕하더라도 저 꽃 같은 놈, 저 봄비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다오. 나는 때때로 잎보다 먼저 피어나는 꽃 같은 놈이 되고 싶다.” 정호승 시인의 <벗에게 부탁함> 이라는 시였습니다. 욕도 이 시인의 부탁대로 라면, 절대로 얼굴을 붉힐 일은 없겠다 싶지요. 새 같은 나무 봄비 같은 놈, 수식어만 달라져도 욕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 역사를 알면 너그럽게 웃어넘길 수 있는 욕도 있는데요. 프랑스 영국간의 100년 전쟁은 두 나라를 모두 피폐하게 만든 지루한 전쟁이었지요. 원시적인 무기로 밖에 싸울 수 없던 그 시절엔 원거리에서의 공격이 가능한 화살이 그나마 꽤나 유용한 첨단 무기였습니다. 또 화살을 잘 쏘면 가장 용맹하고 유능한 병사 취급을 받기도 했지요. 그래서 프랑스 병사들은 영국 포로를 잡으면, 다시는 화살을 쏘지 못하도록, 가운데 손가락을 잘라버렸다고 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야 손가락 하나로도 엄청난 살상무기를 작동시킬 수 있지만, 그 당시 화살을 쏠 수 없는 병사란 이미 죽은 병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싸우기 직전 영국 병사들은, 그런 잔인한 벌칙을 행한 프랑스 병사들 앞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자신의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 나는 아직 가운데 손가락이 남아 있다. 아직 화살을 쏠 수 있으니 명예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 이런 무언의 선언을 해 보인 셈이지요. 물론 지금은 이런 역사적인 의미는 다 사라지고, 그냥 험한 손가락질 하나가 되어 버렸지요. 전쟁터에서 쓰인 그 손짓은 자신과의 약속이었겠다 싶습니다. 안전한 곳 전쟁 같은 것이 없는 고향마을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명예롭게 계속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격려했겠다 는 생각도 드네요.<KBS FM 1, FM가정음악, 2008년 2월 29일 방송>
2. 다윗을 연구한 목사님이 간증을 하셨는데, 한 때 유행하였던 위인전에 포함시킬 만한 내용이었습니다. 한낱 목동에 불과한 어린 소년이 왕의 사위가 되고, 국민적 영웅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실제로 저를 포함해서 많은 목사들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출세나 성공이 인생의 목표인양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표본적인 인물로 설교하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 등장인물들이 살았던 시대를 좀 더 진솔하게 살핀다고 하면, 그들이야말로 하나님 신앙이냐 인간 중심의 야망이냐를 놓고 엄청난 갈등 속에서 살았던 인물들이었음을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대조적인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은 왕 사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목동 다윗입니다. 그들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때에 어떻게 하면 나라를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사울 왕은 결전의 각오를 불태우는 소년 다윗을 전장에 내 보내야 하는 서글픈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첫째는 골리앗과 다윗을 비교하며 싸움터에 나가지 말도록 말리는 장면입니다. 골리앗은 싸움터에서 단련시킨 몸과 무기로 누구도 이길 수 없으니 어림도 없는 짓을 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갑옷을 입히고 칼을 주었지만 몸에 맞지 않아서 벗어던지는 장면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한 나라의 왕으로써 어린 소년을 적장(敵將)의 맞수로 내 보내야 하는 비통한 심정을 감출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등장인물에서 우리는 그들이 가진 뚜렷한 시각차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생 경험과 지혜로 치자면 9단이 넘을 사울 왕은, 인간적인 시각으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체적인 능력과 전투 경험 그리고 무기를 다루는 점 등일 수 있습니다. 골리앗과 다윗은 이런 기준치에서 확연한 차이를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각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사람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경험이 주는 힘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이 가진 능력과 은총이었습니다. 곧 하나님은 칼과 창으로 세상을 이기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칼과 창이 아닌 그 무엇,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다윗은 야훼 하나님 신앙이라는 시각에 온통 뜨거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시며 구원자시란 신앙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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