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684호(2019. 9. 4. 수요일).
시편 34:7-9.
찬송 418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식을 셋을 둔 여인이 있습니다. 큰 아이는 매우 독립적입니다. 숙제도 혼자 알아서 하고 따로 붙들고 공부를 시키지 않아도 성적이 좋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는 엄마만 쳐다봅니다. 숙제도 엄마와 함께 해야 하고, 공부도 엄마가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 둘째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많습니다. 셋째 아이도 둘째 아이와 마찬가지 입니다. 아직 어려서 늘 돌봐 주어야만 합니다. 더욱이 위로 형이 둘이나 있는 셋째 아이는 늘 초조하고 불안해합니다. 혹시 형들에게 자기 몫을 빼앗기지는 않을까? 항상 긴장하고 사는 듯합니다. 다행히 혼자 알아서 잘 해나가는 큰 아이가 있어서 둘째 아이와 셋째 아이에게 쏟는 시간을 많이 마련할 수가 있습니다. 내심 큰 아이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절대로 큰 아이에게 관심이 적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혼자 알아서 잘 하니까 믿고 간섭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엊그제 여인은 숨이 멎는 듯 했습니다. “우리 엄마는 내게만 관심이 없다. 어쩌면 난 주워온 아이인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두 동생만 보살피신다. 오늘도 동생 숙제만 봐 주시고 내겐 숙제를 했느냐고 물어보시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지금 난 몹시 슬프다.” 큰 아이 책상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보게 된 일기장을 펼쳐들고 여인은 그대로 얼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큰 아이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 때문이었습니다. 다섯 형제의 장녀, 그 때문인지 철이 일찍 난 여인은 자기 일은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잘 하는 아이였습니다. 늘 대견하고 기특하고 영특한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기특하다는 말을 들을 때면, 정작 자신은 그 말이 얼마나 싫었는지 모릅니다. 엄마는 다른 동생들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항상 자신을 제외한 다른 가족들에게만 바쁘셨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실 어머니에게 살가운 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큰 아이의 일기장은 반성문처럼 들렸습니다. 어머니가 지금 자신이 큰 아이를 덜 사랑하는 게 아닌 것처럼. 속 깊은 사랑하셨을 텐데도 겉으로는 무관심으로만 보였기 때문에, 그것이 늘 서운한 마음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오후엔 큰 아이와 단 둘이서만 외출했습니다. 그리고 친정어머니도 모셨습니다. 셋이서 오붓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머니와는 살가운 정을 나누며. 큰 아이와는 오랜만에 시간을 함께 하며.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5년 9월 2일 방송>
2.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에게 호의를 베풀다(1-13절)”을 읽었습니다. 삶에는 항상 우선순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똑 같은 시간과 노력 그리고 같은 일을 하여도 우선순위가 다를 때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우선순위의 순서 매김은 각자 다를 수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각자의 몫입니다. 다윗은 이런 우선순위를 제대로 밟아갔던 사람들 중에서 모범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므비보셋에 관한 이야기도 그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한 때 왕의 손자로 장래가 탄탄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루아침에 할아버지 사울 왕과 아버지 요나단의 3형제가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패하여 함께 전사하자, 그 자신의 운명도 곤두박질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 그를 안고 도망치던 유모가 성벽 아래로 떨어트리는 바람에 두 다리가 골절하여 절름발이 장애자가 된 것입니다. 다섯 살 나이에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이 형이라고 부르던(삼하 1:26) 요나단의 혈육 가운데 아들 므비보셋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불러 그의 할아버지 사울 왕의 재산을 물려줄 뿐 아니라, 왕의 식탁에서 왕자들과 식사를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인생사 새옹지마가 딱 어울리는 경우라 하겠습니다.
므비보셋이 행운아라고 말하기 전에, 다윗 왕의 보은(報恩)하는 심성에 점수를 줘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치명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잘 잊는다는 것과, 잊어할 할 것을 끝내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것이 전자요, 용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 후자입니다. 다윗의 위인다움은 은혜를 잊지 않는 그런 사려 깊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가 썼다는 시편을 보면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그의 심정을 잘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이웃에 대한 배려를 살필 수 있습니다. 훗날 므비보셋이 압살롬의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그의 진실함을 믿고 여전히 다윗의 후대를 받았던 것은 또 한 번 다윗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삼하 19:24-30).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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