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969호(2020. 6. 15. 월요일).
시편 87:1-3.
찬송 35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그 내용을 함께 음미해 보고 있습니다. 스무 곡의 노래 중에 일곱 번째 노래를 들으실 텐데요.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전에 없던 마음 하나가 생긴다면, 그건 바로 저 사람도 날 사랑하고 있을까? 이런 불안과 초조일 겁니다.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젊은이 역시, 달아오르는 사랑 때문에 끊임없는 조바심만 찾아들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곡 <초조> 그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모든 나무에다 새겼으면 좋겠네. 조약돌마다 새겨 넣었으면 좋겠네. 싱그러운 꽃밭마다 뿌리고 싶네. 그 말을 금방 들어내 보일 겨자씨와 함께. 흰 종이 쪽지마다 쓰고 싶네. 내 마음은 그대 것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고. 어린 찌르르기 한 마리 기르고 싶네. 그 말을 글자 그대로 분명하게 말할 때까지. 내 입의 소리로, 내 마음에 가득한 뜨거운 열망으로 그녀에게 말할 때까지, 그 때 찌르르기는 그녀의 유리창을 통해 낭랑하게 노래하리라. 내 마음은 그대 것이며,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고. 아침 바람에게 불어넣고 싶네. 싱그러운 숲 속에다 속삭이고 싶네. 오, 모든 꽃 속에서 그 말이 빛난다면. 가까이서 멀리서, 향기가 그녀에게 그 말을 전해 준다면. 물결아, 너희들은 물레바퀴밖에는 움직일 수 없느냐? 내 마음은 그대의 것이며, 영원히 그러하리라. 내 눈 속에 나타날 텐데. 내 뺨 위에서 불타는 게 보일 텐데. 말없는 내 입에서 읽혀질 텐데. 호흡마다 큰 소리로 그녀에게 알려줄 텐데. 그녀는 그 모든 불안한 행동들에서 아무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네. 내 마음은 그대 것이며, 영원히 그러하리라는 것을.”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14년 6월 14일 방송>
2. “인사(1-2절)”, “거짓 교리에 대한 경고(3-11절)” 그리고 “자비에 대한 감사(12-17절)”을 읽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바울 사도의 목회서신 중 첫 번째인 디모데전서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목회서신의 수신자인 디모데와 디도는 훗날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에베소 교회와 지중해의 그레데 섬의 교회를 맡았습니다. 그런데 목회서신이 과연 바울의 저작이냐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바울 서신과는 상당한 차이를 들어내는 때문입니다. 5가지나 되는데 그 중 하나만 이야기하자면, 바울의 신학사상의 특징인 “오직 믿음”이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사상을 목회서신에서는 찾을 수 없는데 반해, 목회서신에서는 오히려 “선행”을 강조하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특징은 변할 수가 없는 것들인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서신에 분류하는 것은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두 가지 큰 문제들, 곧 안으로는 이단으로부터의 공격과 밖으로는 박해라는 시련을 대처하기 위해서, 바울의 권위로 지도할 요청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물론 디모데와 디도는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로, 훗날 바울 학파가 떠올리기 쉬운 지도자였다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초대교회는 변화하는 시대를 통과해야 할 과제를 맡았던 일꾼을 필요로 했다 생각됩니다.
둘째 단락을 묵상하겠습니다.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가장 힘든 문제는 거짓 교리를 퍼트리는 이단들이었습니다. 제가 약 20년간 베델성서연구원의 신약부 강사로 전국교회를 방문 순회 강의할 때, 대부분의 교회당입구에는 소위 신천지를 반대한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이들 외에도 적잖은 이단 교리들이 교회 깊숙이 들어와 있다고 보는데 바로 세칭 구원파들입니다. 여기엔 기성 교회들 상당수가 이런 이단에 일조하고 있는 점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구원파로 분류되는 박옥수의 <기쁜 소식>은 “구원받은 날짜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의 허구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남겨두고,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거짓 교리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를 퍼트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신화는 역사 이전의 시대에 활발했던 주장들인데, 모든 신앙과 삶의 궁금증을 신화라는 이야기로 해결하려는 시도들입니다. 그러니까 신화를 끌어내서 신화로 끝내야 하는데, 그 신화에 빠져버리게 만드는 교묘한 술책입니다. 족보이야기도 비슷한 논리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런 주장은 논쟁만 생길 뿐,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소용없는 일이라 일축합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의 용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촉구하고 있는데,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죄를 치리하는 방법으로 좋은 것이라 전제한 후, 결국 율법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과제가 있음을 밝힙니다. 율법은 인간의 영광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율법적 구원은 어리석은 시도임을 암시한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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