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74(2020. 9. 28. 월요일).

시편 시 106:15-18.

찬송 5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선호 선배님께> 오늘 새벽에 선배 꿈을 꾸면서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아주 짧지만 아주 선명한 꿈이었어요. 집에서는 잘 확인해 보지도 않는 휴대전화에, 부재중 전화가 12. 모두 선배로부터 걸려온 전화라 것들이라, 놀라서 부랴부랴 전화를 받았어요. 곧 선배가 그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어요. “멀리 있더라도 우리 좀 전화는 하고 살자.” 대뜸 선배는 서운하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지요. 그런데 그 정감어린 목소리를 듣는 한 편에서는, 문득 , 이거 꿈이겠구나.” 를 느낄 수 있었고, 저는 곧 그 실망감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고 말았어요. 그 꿈 때문일 거예요. 이 이 메일 주소는 여전히 유효할까를 걱정하면서도, 이 편지를 쓰는 것은요. 그동안 정말로 오랫동안 소식 전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못난 변명 같지만 좀 더 나아지면 기쁘게 해 드릴만한 얘깃거리가 생기면, 가장 먼저 소식 드려야지, 이 생각은 늘 하고 있었어요. 제 갈 길을 잘 찾아가고 있구나.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아직도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라, 먼저 연락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마음속으로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새벽 그런 꿈도 꿨던 것이겠지요. 자격지심이라는 말 있지 않아요? 한두 가지 일이 꼬여서 기운을 잃은 사람에게 가장 먼저 잽싸게 달라붙는 게 바로 그 자격지심인 것 같습니다. 기력을 잃으면 감기 걸려서 콧물 나고 기침부터 나는 것처럼 말이 예요. 그래서 남들은 제 일이 꼬여 가는지 어떤지 느끼지도 못하거나, 자기 일에 바빠서 신경도 쓰지 못하는데, 저 혼자 괜히 잔뜩 위축돼서는 뒷걸음을 치게 되지요. 지난 1년간 제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꿈속에서의 선배의 정다운 목소리를 덕분에, 먼저 편지를 보내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어요.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보니까 제대로 알겠더라고요. 제 마음이라는 화단에서 절대로 뽑아낼 수 없는 존재들이 누구누구인지를 요. 지금 제게 일어난 일이나 제가 감당하지 못할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안부를 전할 만큼의 기운은 차렸습니다. 힘들 때마다 선배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곤 했어요. 그 생각만으로도 늘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선배님, 정말 보고 싶네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73일 방송> a.

 

2. “유대인에게 배척을 받으신 예수(19-30)”을 읽었습니다. 사람과의 대화도 어려운데 짐승과의 대화라니, 얼마나 황당한 얘기일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작년에 아내가 반려견이 필요할 때라며 강아지 한 마리를 분양받았는데, 올해 또 한 마리를 더 분양 받았습니다. 그런데 두 마리 모두 저를 더 많이 따라서 아내가 많이 서운해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제가 아내와 얘기하는 것보다 두 마리 강아지와 더 많이 대화하는 걸 몹시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강아지들이 제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얼굴을 마주보며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오늘, 내일 그리고 내일 밤을 자고 서울로 올라가자! 알았지?” 그런데 이런 한 마디 말에도 많은 동작이 뒤따르게 됩니다. 손가락을 하나 둘 꼽으면서, 잠을 자는 시늉도 하고, 차를 타고 가는 것도 말과 몸짓으로 전달을 하는 겁니다. 제대로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다른 의사소통의 방법이 없으니까 제 방식대로 해 보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강아지는 알아듣는 듯 잠잠해 집니다. 알아듣지는 못해도 저의 대화를 위한 시도만큼은 인정해 주는 것 같습니다. 두 강아지를 앞에 두고도 훈육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언니는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 순서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러면 둘째는 끼잉하면서 불만 섞인 소리를 내곤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착한 목자인 자신의 소개에, 유대인들이 불만을 털어놓은 일화입니다. 등장인물들 사이의 이해를 측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본문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을 거닐고 계시는 주님을 찾아간 유대 지도자들은 그들의 속내를 밝힙니다. 그런데 아주 그들의 속내는 간절하였습니다. “당신이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야입니까? 우리 마음을 조이게 하지 말고 속 시원히 말씀 좀 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그들이 수집한 정보로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메시야의 조건을 갖추지 못했지만, 내용적인 면에서는 메시야가 되고도 남았으니 말입니다. 모세나 다윗과 같은 위엄과 당당함을 찾을 수 없었으나, 가르침과 능력에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위를 가지셨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짊어지러 오신 하나님을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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