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76호(2020. 9. 30. 수요일).
시편 시 106:23-25.
찬송 29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버님께 남도에서 쓰는 편지> “무엇인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동안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 란 말이 있습니다. 요즘 전 매일매일 인생은 살만한 것이다. 내 나라 내 당 사람들은 눈물겨울 만큼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들이다 은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키운 땅 남도 기행, 저는 강진 장흥 보성 여수 광양 순천을 거쳐서, 이제 구례를 향할 예정입니다. 지리산에 올라 우리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되새김질 해 볼 생각이고요. 대부분의 친구들이 해외여행을 계획할 때, 저도 당연히 그들 중에 한 명이 돼서 떠날 작정을 했을 때, 아버지가 슬쩍 한마디 하셨지요. “세계를 보기 전에 먼저 우리 국토를 밟아 보는 것이 어떻겠냐?” 알고 보니 젊은 날, 김정호의 생에 감명을 받은 아버지는, 틈만 나면 지도 하나에 의지해서 우리 땅 먼 곳곳을 돌아다니셨더군요. 그렇게 우리의 땅을 발로 한번 인지하고 나면, 먼 독도에서부터 우리 땅 전체에 대한 애정의 강도가 달라진다는 말씀, 뭔가 막연하게 휩쓸려 다니던 제겐 어떤 나침반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버지를 키운 땅, 아버지의 젊음이 배어 있는 남도부터 시작해 봤습니다. 배낭 하나 메고 새까맣게 탄 저를 불러서 새참을 함께 먹자고 권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했고요. 강진의 한 식당 아주머니는 혼자 남도를 돌아보는 중이라는 제 말에 힘내라면서, 메뉴에도 없는 돼지고기 볶음을 내오시기도 했습니다. 또 길 가다가 문이 열린 집으로 들어가 물을 청하자, 미숫가루를 타 주시던 할머니를 만나기도 했지요. 마치 아버지가 저를 위해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친척들에게 미리 연락이라도 해 두었나 싶게, 어찌 그렇게 친절하기만 한지, 가슴이 뜨끈뜨끈 해 지곤 했습니다. 아버지만의 단어 사용법도 확실하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길 가다가 식당에서 5일 장에서 만난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무수하게 들을 수 있었던 그 거시기 하다는 말, 그 거시기한 느낌을 이젠 확실히 감 잡아 버렸습니다. 내친 김에 내년 여름엔 어머니의 땅 강원도를, 그리고 끝내는 독도까지를 모두 밟아 보고 싶어졌습니다. 어머니께 저 씩씩하게 살아 있다고 전해 주십시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8월 13일 방송> a.
2. “나사로의 죽음(1-16절)”을 읽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 베다니에는 나사로와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 3남매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정의 가장격인 나사로가 오랜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주님께 전한 것입니다. 이 나사로 가정은 우리 주님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해설을 붙이고 있는데, 마르다가 옥합을 깨트려 주님의 머리로부터 발까지를 부었던 일화와 주님께서 그 집에 들러서 식사를 하신 일 등을 염두에 둔 말일 것입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을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인생 통과의례라고 하는데, 그 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생각만은 특별한 것이 사실입니다. 한 인간의 일생을 가늠하는 단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는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별세한 이웃을 찾아보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막역한 관계였다고 하면 두말할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사로의 별세 소식을 듣고도 특별한 사정이 있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이틀씩이나 머무적거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이제 내가 깨워야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유대로 향하셨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는 기독교 신앙 여부와 관계없이 “영별(永別)”이라는 말까지 사용하면서, 극단적인 이별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죽음을 전혀 새롭게 이해하시는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주님은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잠을 자고 있으니 깨우면 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에도 죽음을 “영면(永眠)”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영원한 잠듦이란 잘못된 표현이지만 말입니다. 이제 우리도 죽음에 대한 이해를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죽음이란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님께서 깨우시는 날, 기분 좋게 눈을 뜨고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솔직히 저는 잠자리에 드는 것을 행복하게 느끼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하루를 열심히 일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 운운하면서 말입니다. 나사로의 무덤은 빈 무덤이었습니다. 2천년이나 지났으니 아무 것도 남을 수 없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깨어났고, 그 뒤에 또 다시 잠들었겠지만 다시 깨어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너무 깊은 잠에 취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우리를 깨우실 주님께서 그 날을 준비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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