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158호(2020. 12. 21. 월요일).
시편 시 119:73-77.
찬송 94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형철 씨에게> 두어 번 지나가는 말처럼 성탄절 전야에 또 성탄절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보셨지요. 서로가 덤덤한 성격이라 지금껏 이벤트 같은 것에서 자유롭게 지내왔던 것 같은데, 어쩐지 이번만큼은 제게 뭔가를 보여주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느끼시는 것도 같더군요. 그 모습들 아무 것도 아닌 듯 슬쩍 묻는 질문 속에 담긴 배려의 마음들이 애틋하고 좋아서, 여태 모르는 척 하면서 혼자 즐기고 있었네요. 그런 마음에 열심히 박자를 맞춰주지 못하는 저라는 사람, 조금 재미없고 심심하지요.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재미없고 심심한 사람인 것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그다지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하고 있다는 사실이지요. 뭐랄까 이건 제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형철 씨에 대한 신뢰의 표시인 것 같습니다. 만난 지 100일되던 날이나 초콜릿 사탕을 주는 날이라고 떠들썩하던 날에도 호들갑을 떨지 않고 조용히 넘어가면서 전 늘 형철씨도 그런 거 바라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제가 뭔가 큰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형철 씨 역시 그런 절 편하게 여기는 것 같다고 마음대로 짐작해 버린 것도 사실입니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예요. 전 그날이 마치 연인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날 인양, 소란스러워 지는 것에서 늘 한발자국 물러서 있곤 했었거든요. 형철 씨 만나기 전부터 늘 그랬지요. 대신 평소에는 냉담 자처럼 지내는 사람이지만, 성탄전야만은 부모님과 집 근처 성당을 찾곤 해요. 마음을 대청소하는 기도의 시간이랄까요. 아무튼 전 올해도 그 시간을 그렇게 보냈으면 합니다. 대신 24일 저녁 퇴근 후 잠깐 만날 시간은 비워 둘게요. 크리스마스에 뭐 할 거냐 던 형철 씨의 물음에 대한 제 대답, 너무 싱겁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12월 23일 방송> a.
2.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증언(30-47절)”을 읽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가 누구신가? 하는 물음으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합니다. 나사렛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분명한 사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불가에서는 인간이 해탈을 하면 영원히 불사(不死)하는 부처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분이 예수라고 가르칩니다. 두 종교는 모두 인간의 이성으로는 있을 수 없는 주장으로 치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부분의 이성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거부하고 신앙을 거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경향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들을 마주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가르침을 얻고자 종교(宗敎/근본적인 가르침)적인 신앙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이런 종교적인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예수가 누구신지에 대해 예수 자신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첫째로 예수는 자신의 뜻을 따라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심판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말씀합니다. 둘째는 예수는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는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신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세례를 받으시고 물위로 올라오실 때, 그리고 변모산에서 들려오신 하나님의 음성을 말씀하고 있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예수 자신의 증언인데 모세가 기록한 모든 내용은 자신에 관한 말씀이라고 한 것입니다.
신앙에 이르는 길은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이성적이고 법치주의 자였으며 초기에는 기독교의 박해자 중 한 사람으로 유명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한 장본인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어머니 헬레나와 누이가 이미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야사(野史)에 의하면 콜로세움에서 굶주린 사자의 앞에서 처형당하는 기독교인들의 눈이 샛별처럼 빛나는데 반해서, 관중석에서 술에 취해 떠드는 로마시민들의 눈은 썩은 동태눈과 같은데서, 찬란한 로마의 문명을 계승할 사람으로 기독교인 만한 존재가 없어서 그리하였다고 합니다. 합리적인 이유로는 유일신 사상과 황제권의 세습을 들고 있으나, 이 또한 증명 불가능한 야사임에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은 자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얻을 수 있는 철저한 타력에 의한 신앙임을 베드로의 고백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 16:16-17).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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