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203(2021. 2. 4. 목요일).

시편 시 129:5-8.

찬송 23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괴테의 시 가운데 <앉은뱅이 꽃의 노래>라는 시가 있다. 어느 날 들에 핀 한 떨기 조그만 앉은뱅이 꽃이, 순진무구한 시골 처녀의 발에 짓밟혀서 시들어 버리고 만다. 그러나 앉은뱅이 꽃은 조금도 서러워하지 않는다. 추잡하고 못된 사내의 손에 무참히 꺾이지 않고, 밝고 깨끗한 처녀에게 밟혔기에 꽃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들에 핀 조그만 꽃 한 송이에 불과하지만, 꽃으로서의 보람을 찾고자 했던 앉은뱅이 꽃을 이야기하면서, 이 시의 상징을 좋아 한다 고 한 이는 수필가 안병욱입니다. 그는 행복의 메타포를 설명하기 위해서 앉은뱅이 꽃을 예로 들었는데요. 메타포란 은유법을 말하지요. 곧 앉은뱅이 꽃이 상징한 보람에 깃들어 있는 것이 다름 아닌 행복입니다. 따라서 보람이 크면 클수록 기쁨도 커지고 행복도 커진다는 말이 됩니다. 그렇다면 보람은 언제 느끼게 되는 걸까요?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려고 캔버스 앞에 설 때, 작곡가가 좋은 곡을 지으려고 몰두할 때, 어머니가 자식의 성공과 장래를 위해서 밤낮으로 정성을 기울일 때, 우리는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되고 그 보람 때문에 고생이 고생으로 느껴지지 않고 기쁨으로 변합니다. 보람 있게 살려고 애쓰다보면 절로 따르는 것, 바로 행복입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18일 방송>

 

2. “베드로의 고백(27-30)”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31-9:1)”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두 번째 단락입니다. 이른바 수난 예고는 공관복음서 모두 세 차례 취급하고 있습니다(8:27-33, 9:30-32, 10:32-34). 그만큼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수난 예고란 예수께서 유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고 그들 손에 죽을 것이라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따르고 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것과 사흘 만에 다시 살게 될 것이라는 두 가지 내용이지만,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대목이 그들에게는 심각하다 못해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해서 그래서는 안 된다며 펄쩍 뛰긴 했지만, 예수님의 한 마디 말씀 사탄아,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는 말씀에 그 기세 등등하던 충성심이 꼬리를 감아버린 것입니다. 둘째와 셋째 수난 예고에서는 놀라기는커녕 무덤덤하게 들어 넘기는 수준에 불과했다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본전도 찾지 못할 말씀을 세 번씩이나 하셨던 것일까요? 그리고 이런 내용을 복음서 기자들은 모두 세 번씩이나 수난 예고를 편집해서 기록했을까요?

   제가 오래 전에 한 정치가의 채플 연설을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유명 정치가인 아버지와 유명 변호사인 어머니를 둔 분으로, 제목은 어머니의 잔소리가 그립습니다.”는 제목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잔소리는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듣고 또 들어서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 생전에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따르지 않았었는데, 별세하신 후에는 그 소리가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말씀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내용은 매우 단순 명료한 것이었는데, “일찍 일어나고 일찍 자거라. 밥은 거르지 말고 꼭꼭 씹어 먹거라. 길 조심해라. 좋은 친구를 사귀 거라. 이불은 꼭 덮고 자거라.” 등 등 우리 모두가 흔히 듣고 자란 말씀들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들이 생전에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지금은 너무도 분명히 들려서 매일 매일 그 말씀을 지키고 있다며 눈물까지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 역시 주님 생전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보리 떡 5개와 생선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분이, 물 위를 걸어오셔서 광풍을 말씀 한 마디로 잠재우신 그런 분이, 죽어 상여로 나가던 젊은이를 다시 살려내신 분이, 당신이 앞으로 죽게 되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대수롭지 않게 들렸을 게 분명합니다. 쓸데없는 소리라고 아예 귀를 틀어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사흘 후에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떠나가신 후에야, 그 말씀이 새록새록 마음에 스멀스멀 피어오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말, 귀한 말, 필요한 말은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당장에는 듣기 싫다고, 안 듣겠다고 귀를 막고 별짓을 다하더라도, 반드시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을 믿으면서 말입니다.

 

3. 며칠 전 캐나다에 사는 막내딸과 오랫동안 영상통화를 하였습니다. 남매를 두었는데, 손녀는 중학교에 입학을 앞두고, 영재학교에 입학할 3명의 대상자에 들었다고 하고, 손자는 지난 학년 올 에이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 한국 아이들이 캐나다 아이들 보다는 공부를 잘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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