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419호(2021. 9. 8. 수요일).
시편 시 29:3-6.
찬송 49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동안은 여행을 한다고 하면, 우선 인터넷에서 여행정보부터 찾았습니다. 가려고 하는 곳의 여행안내서부터 찾아 읽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해외여행에서 특히 배낭여행에서는 지도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지도를 제대로 보는 법도 잘 모릅니다. 때론 봤다가 더 혼란이 생기기도 합니다. 실제로 별로 필요치도 않았습니다. 인터넷이나 책에 쓰인 정보를 읽거나, 지나가는 사람에게 묻는 게 훨씬 더 빠르고 간단합니다. 특히 도시 지도도 아닌 세계지도야 더욱 그렇습니다. 세계 일주를 하지 않는 다음에야 굳이 들여다 볼이 일이 없습니다. 안 봐도 잘 알기도 합니다. 학창시절에, 아시아며 유럽 북미 대륙들의 위치며, 각 나라들의 위치까지 충분히 공부했으니까요. 그러니 집 책상위에 지구본이 있어도 그저 장식물일 뿐, 굳이 들여다 본 적이 없습니다. 일부러 세계지도나 나라지도를 들여다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휴가동안 중국을 여행한 뒤 달라졌습니다. 갑자기 지도가 궁금해졌습니다. 자신이 다녀온 곳이 중국의 어디쯤인지, 또 전체의 세계지도에서 정확히 어떤 식의 국경선을 가졌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내년에 가고 싶은 유럽의 나라들도 정확한 위치가 궁금해졌습니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세계지도를 다시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어떤 나라와 도시가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누구와 경계선을 공유하고 있는가, 그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도 그곳을 이해하는데 참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세계지도든 국가나 도시 지도든, 그냥 지도를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것만도, 그곳으로 가는 여행이나 다녀온 뒤의 여행을, 훨씬 남다르고 깊이 있게 만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2년 8월 23일 방송>a.
2. “예수를 죽일 음모(1-2절)”과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3-11절)”을 읽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30년도 넘은 아득한 옛날(?)에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신앙 사경회를 열었는데, 어느 신학대학의 구약학 교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비분강개하면서 왜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동네 아이 부르듯 예수 예수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에는 찬송가에 나오는 가사를 예수님으로 부르느라 여간 땀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성경을 번역하는 분들이 어찌하여 예수님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예수라고 번역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로 가슴아파하실 분들이 계실까 해서 제 소견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당사자의 면전에서는 성별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존중하는 뜻에서 님자(字)를 붙이는 것이 문법이전에 좋은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학 1학년일 때 최고령이신 교수님이 제게 “학형(學兄)”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둘째, 글이나 대화에서 제3자로 나오는 인물에 대해서는 이름이나 직함을 쓰는 것이 무례하지 않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왕들이나 철학자들 그리고 현자들 역시 그렇게 호칭하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님, 석가모니님이라거나 톨스토이님이라는 호칭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입니다. 셋째, 호 불호로 갈릴 수 있는 분들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호칭이 무난하다는 것입니다. 같은 종단 안에서야 극존칭을 쓰던 그게 거슬리지 않겠지만, 일반인들도 읽을 수 있는 도서에서는 쉽게 접근할 수 없어 그런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성경에 소개되는 숱한 기적 이야기들은 매우 선별된 일화들일 뿐 전체를 다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 역시 나병에서 고침을 받은 많은 환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집에서 식사를 하셨다고 하니까 아마도 나병 치료를 끝낸 후라고 생각이 되는데, 마침 한 여자가 나타나 값진 향유 한 옥합을 깨트리고 주님의 머리에 부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향유의 값이 300데나리온 이상이 될 것이라며,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는데 낭비를 했다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 주님은 크게 역정을 내십니다. “참견하지 말라. 이 여자는 내게 갸륵한 일을 했다. 가난한 이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으니 도울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언제든 너희와 함께 있지 않을 테니, 이 여인은 나를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한 일도 사람들에게 기억될 일이다.”고 말입니다. 엄청난 향유를 낭비한 여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위해서 매우 귀중한 일을 했던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기억되는 사람들, 그 행복한 사람들의 이름 속에 기억될 수 있으려면, 이 여인처럼 주님께 받은 은혜에 감격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숙한 신앙에서 성숙한 신앙으로. / 막 14:27-42. (0) | 2021.09.10 |
---|---|
마지막 만찬이 계속 진행될 이유. / 막 14:12-26. (0) | 2021.09.09 |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이유. / 막 13:28-37. (0) | 2021.09.07 |
우리가 주님께 듣고 싶은 한 마디 말을. / 막 13:14-27. (0) | 2021.09.06 |
하나님 성전의 돌멩이까지도 다 무너질 날이 온다는 뜻. / 막 13:1-13. (1) | 2021.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