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660(2022. 5. 7. 토요일).

시편 시 74:4-7.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5월 아카시아 꽃향기가 무척이나 강하게 나는 그러한 달입니다. 아카시아는 생명력이 참 강한 그러한 나무로 알려져 있지요. “동구 밖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이렇게 시작하는 <과수원길>. 많은 분들이 아끼는 동요입니다. 이 과수원 길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흔히 아카시아. 흔히 아카시아 나무라고 불립니다만, 아카시나무 아카시 나무 이렇게 불리지요. 흐드러지게 꽃을 피워서 산길을 자신의 향기로 가득 채우는 나무입니다. 멀리서 보는 아카시아 꽃은 녹음 속에 간간히 희끗희끗할 뿐이어서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만 그 향기는 무척이나 진하고 그윽하지요. 가까이서 이 꽃을 보게 되면 조롱조롱 매달린 꽃들이 은근하면서도 단아한 매력을 뽐냅니다. 그 아카시아 꽃을 따 먹어본 기억이 있는데요. 약간 알싸하고 비릿하고 약간 향기 나는 그러한 맛이 느껴집니다. 여러 개 잎사귀가 달려 있는 아카시아 큰 잎을 따서 가위 바위 보 놀이를 해서, 누가 먼저 잎을 따는지 그러한 내기를 하기도 했지요. 진하고 달콤한 아카시아 꽃향기가 바람에 날리는 5월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56일 방송>

 

2. “사회정의와 사회 복지에 관한 법령(1-13을 읽었습니다. 요즘은 흔하게 사용하는 사회정의라는 용어는 1971년 미국의 진보주의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가 저작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 1971)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이에게 자유를 완벽하게 누리게 할 수 있어야 하며, 빈곤한 사람들의 복지를 우선으로 배려해야 한다. 또한, 결과의 불평등은 존재하되, 모든 사람에게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 정의의 원칙이다.”라고 사회정의를 정의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매우 구체적으로 사회정의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언비어를 하지 못하게 하고, 죄를 지은 힘센 사람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지 말고, 다수를 따라 불의에 가담하지 말고, 그릇된 재판에 증언을 서지 말며, 영세하다고 사정을 보는 증언을 해서도 안 된다고 합니다. 원수의 소나나귀가 길을 잃고 헤맬 때 주인을 찾아주어야 하고, 미워하는 사람의 나귀가 짐에 깔렸을 때 반드시 도와주며, 가난한 사람의 소송에서 그의 권리를 꺾지 말고, 허위 고발이나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말고, 악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지 말라. 뇌물을 받지 말고,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고, 밭은 6년 경작한 후 안식년에는 땅을 묵혀두고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고, 들짐승에게도 먹게 하라. 포도밭이나 올리브 밭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 되는 날 쉬는 것은 소와 나귀 그리고 남종과 여종들도 함께 쉬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과 짐승까지도 쉬게 한 것입니다.

   이런 사회정의의 현장이 이미 3,500년 전부터 시행되고 있었다는 것은 아름답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합니다. 알렉스 헤일 리의 소설 <뿌리>는 영화로 소개되었는데,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명화로, 노예들을 배 밑창에 돼지 떼처럼 처박아두고, 갑판에서는 백인들이 찬송과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쿤타 킨테에게 그 백인들이 부르는 찬송과 드리는 기도가 어떻게 생각되었을까요? 아직도 우리가 살고 있는 소위 문명사회에서도 인종 차별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피부 색깔로 차별되는 것 말고도, 재력에 의해서, 학력에 의해서,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에 의해서 그리고 신체상 또는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해서, 차별되고 무시되는 현상을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맹인교회나 농인교회를 출석할 때, 혐오시설이라면서 전세를 주지 않아서 아예 교회 문을 닫는 경우도 보았고, 심지어 장애 학생들의 배움터를 만들겠다고 하니까, 지역 주민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시위까지 벌이는 일이, 선진국에 들어섰다는 대한민국의 민낯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여성 목사제를 택한 어느 진보적인 교단에서 오신 목사님이 이런 하소연을 하셨습니다. “여성 목사는 구색을 갖추기 위한 것 같습니다. 담임 권은 물론 설교권도 허락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런 분들을 부러워하는 여성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아예 제도적으로 장벽이 높게 쳐져 있으니 말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우리는 사회정의가 실현된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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