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24호(2023. 1. 26. 목요일).
시편 시 119:25-27.
찬송 40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요즘 사람들은 일이나 명예보다 건강이나 행복 이런 삶의 질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지요. 단순히 웰빙을 넘어서 웰빙에 환경까지 생각한 로하스. 건강에 아름다운 외모까지 추구하는 웰루킹. 출세보다 가정을 더 중시하는 슬로우리. 그리고 정신의 건강과 안정을 추구하는 네오 웰빙족까지. 이렇게 다양한 신조어들은 사람마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또 행복하다고 느끼는 기준이 다양해졌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스스로 만족하고 즐길 수 있는 삶이, 바로 진짜 행복한 삶이겠지요? 오늘은 한 주의 바쁜 일상 잠시 접고, 마음의 안정을 찾는 여유 있는 아침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8년 1월 27일 방송>
2. “율법이냐? 믿음이냐?(1-14절)”을 읽었습니다. 율법과 믿음은 모든 인간 앞에 놓여 있는 커다란 숙제와도 같습니다. 율법은 모든 사람이 함께 잘 살기 위해서 서로 지켜야 할 규칙과 도덕률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현실 세계에서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들이라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민의식에 대해서 찬사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 참 가슴 뭉클 할 때가 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한 무법자가 흉기로 지나가는 사람을 헤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어린 아이를 헤치려는 것을 본 한국인 승무원이 그 아이를 감싸 안고 그 무법자가 휘두르는 흉기에 등과 가슴 등에 큰 자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해서 미국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승무원에게 사람들이 물었다고 합니다. 그런 위기에 자신이 당할지도 모를 위험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승무원 자신이 사는 대한민국 사람들은 뒷일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일어나는 불행을 최대한으로 막아보려고 자신과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그래서 많은 외국인들은 대한민국의 시민은 훌륭한 시민의식을 가졌다고 칭찬했다 합니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날로 기세를 더하는 세상에서 도덕률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초석일 것입니다.
유대교를 비롯해서 대부분의 종교들은 도덕률을 강조해 마지않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어떤 사람이 천당이나 극락을 갈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거의 대부분은 착하게 산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아니하고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돕는 사람을 일컫는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은 이런 도덕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덕률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기본 덕목일 뿐,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주장입니다. 불교는 사성(고제, 집제, 멸제, 도제) 팔정도(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 가지 실천사항을 요구하는데 불가능한 요구사항입니다. 유대교는 십계명을 비롯해서 613가지 계명을 철저하게 지킬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불가능한 요구사항입니다. 힌두교는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교리는 없지만 심오한 형이상학적 이상을 추구하는데 대체로 다음 네 가지를 요구합니다. Dharma, Artha, Karma, Mosha가 그것들입니다. 힌두교의 교리도 실현 불가능한 요구들입니다. 마호멧교는 6신 5행이란 교리를 가지고 있는데, 6신이란 믿어야 할 여섯 가지를 말하는데(알라/ 천사들/ 경전들/ 예언자들/ 마지막 심판/ 운명론)이며, 5행이란 샤하다(신앙고백), 살라트(매일 5회 기도), 사움(라마단 지킴), 자카트(빈자를 위한 헌금), 하즈(일생 한번 성지순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실현 불가능한 요구사항입니다. 이렇듯 모든 종교의 율법적 요구는 불가능에 도전하라고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진행하신 구원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인간의 의지나 노력에 의한 율법적 의는 완전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을 수도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인간 중심의 율법적 의를 이룬다 해도 이는 상대적인 의일 뿐 헛된 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구원의 길, 곧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죄와 잘못을 대신 갚아 주시는 일, 곧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 구속사업인 하나님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에 의한 구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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