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26호(2023. 1. 28. 토요일).
시편 시 119:31-32.
찬송 20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20년대를 전후해서 출생한 작곡가들은 서양음악의 기법을 받아들이는데 힘썼던 전 세대의 작곡가들과는 달리 개성이 담긴 우리 가곡을 창작하는데 몰입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1993년 작고한 나운영 선생 역시 그러한 작곡가들 중 한 분이었지요. 그는 한국 가곡을 작곡하는데 있어서 현대적인 음악 기법과 어긋나는 시조들을 노랫말로 적합하지 않다고 말을 합니다. 동시대의 말이 반영된 글만이 동시대의 음악과 결합해서, 제대로 된 우리 음악 진정한 우리 가곡으로 창작될 수 있을 거라고 말을 하지요.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말처럼, 그의 곡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서, 해외 무대에서도 벽안의 가곡 펜들에게 큰 인기를 얻기도 했습니다. 윤공강의 시에 곡을 붙인 <별과 새에게> 역시 해외 무대에서 큰 사랑을 받은 나운영의 가곡들 중 한 곡이지요.
“만약 내가 속절없이 죽어, 어느 고요한 풀섶에 묻히면, 말하지 못한 나의 기쁜 이야기는, 숲에 사는 작은 새가 노래해 주고, 밤이면 눈물어린 금빛 눈동자 별 떼가 지니고 간 나의 슬픔 이야기를 말해 주리라. 함께 넋을 받아 태어난 몸이나 나는 울지 말자. 슬피 울지 말자. 나의 명이 다하여 내가 죽는 날, 나는 별과 새에게 내뜻을 품고 가리라.”
1948년 발표한 [나운영 예술 가곡집]에 수록되었습니다. 겨울밤의 차갑고 서늘한 서정과 잘 어울리는 곡인데요. 이 곡은 죽음을 담담하게 노래한 윤공강의 시와, 애상어린 멜로디의 조화가 돋보입니다. 한국 가곡의 새 방향을 제시한 걸작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곡인데요. 테너 김신환이 이곡을 이탈리아에서 연주 했을 당시에 많은 갈채를 받아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운영은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사람들에게 꽤 엄격한 요구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요나 시조 판소리 등에서 유래된 한국적인 창법을 억제하고, 서양 성악의 발성을 철저하게 요구했다는 것이나, 가곡 발표회 장에서도 성악가들이 목을 가다듬기 위해서, 비교적 부르기 쉬운 우리 가곡을 앞부분에 배치하는 것을, 엄히 꾸짖었다는 일화를 통해서, 그러한 사실 들을 짐작할 수가 있지요. 우리가곡에 대한 작곡가 나운영의 올곧은 애정이 느껴집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월 28일 방송>
2. “율법의 목적(23-29절)”을 읽었습니다. 1970년대 한국 신학계에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남미의 해방신학에게 영향을 받아, 우리만의 신학을 정립해야 한다며 소위 <민중 신학>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는 “바울에게서 예수에게로!”라는 주장도 꼽을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바울의 사상이 예수의 정신을 가로막아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사상을 벗겨내야 제대로 된 예수 사상을 찾아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구약학자 궁켈과 신약하자 디벨리우스 등이 강조한 소위 양식사 비판이 엄청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희망이 한 몫 했을 것입니다. 양식사 연구란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어떤 일정한 양식들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이른바 그 삶의 자리(sitz im leven)를 확보하게 된다면 성경의 의미를 보다 더 분명하게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인데, 결국 그 삶의 자리를 찾을 수 없음으로 실패한 이론이 되었습니다. 다시 민중 신학으로 되돌아가서, 바울을 무시하거나 바울을 빼놓고 성경은 물론 기독교 역사를 논의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의해서, “바울에서 예수께로”는 희망은 성급한 기대가 된 셈입니다. 바울 없이 복음서도, 바울 없이 예수의 가르침도 정리할 수 없음을 뒤늦게라도 알게 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부모 없이 하나님께로!” 얼마나 헛된 주장인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인 작업을 무익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을 통전적으로(integrity) 이해하려고 할 때 가장 편리하게 사용하는 것이 신학이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전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제가 사는 시골마을에 한 떼의 젊은이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교회 청년들을 위한 무슨 강좌를 한다며 어디론가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구약과 신약 그리고 성약(成約)이라는 이상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합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율법이 제구실을 못하니까 예수를 믿어야 하는 신약이 나왔고, 이제는 직접 구세주를 만나야 햐는 성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도 13장 11-12절을 근거로 한다 했습니다. 달랑 성경 한구절만 가지고 얘기하는 이들의 문제가 바로 이렇게 나타나곤 합니다. 각설하고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합니다. 율법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만, 그것은 헛된 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 때문에 절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의 길,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십자가를 통해 죗값을 치르게 하셨고,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죄 없다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건은 전에도 이제도 없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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