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075호(2023. 6. 26. 월요일).
시편 시 147:19-20.
찬송 43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청록집]은 광복과 민주주의가 들이불어 우리나라에 정치적인 파도가 가장 거셌던 1946년 발표 됐습니다. 하지만 [청록집]에는 당시 우리나라를 둘러싸고 있던 역사적인 격동이나 시인들의 남루했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청록파 시인들은 유독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했지요. 박두진과 박목월은 실제로도 시를 쓰고 후진 양성한 것 외에는 큰 관심이 없던 것으로 전합니다만, 조지훈은 조금 달랐습니다. 선비이자 학자로 명망이 높았기에 훗날 정치에 발을 들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조지훈의 이름 옆에 붙는 가장 자연스러운 직함은 시인이었습니다. 정치인과 어울려 술을 마시면서도 시절을 한탄하며 시를 읊었을 정도로 말이지요.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면, 구만리 구름길에 학이 운다. 이슬에 함초롬 젖은 풀잎은 달빛도 푸른 채로 산을 넘는다. 물위에 바람이 흐르는 듯이 내 가슴에 넘치는 차고 흰 구름. 다락에 기대에 피리를 불면, 꽃 비 꽃바람이 눈물에 어린다. 바라 뵈는 장운산 열두 봉우리. 싸리나무 새순 듣는 사슴도 운다.”
조지훈 시인의 사진을 보면, 큰 키에 굵은 테 안경을 쓴 멋쟁이였습니다. 지인들은 후리후리한 키에 단장을 짚고서 두루마리 자락을 내리며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조지훈의 문인이자 선비로써의 고집이 묻어난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피리를 불면>은 광복 전 일본의 탄압이 극한에 이르렀던 시기에 완성된 시였습니다. 답답한 현실 속에서 고뇌해야 했던 시인의 억눌린 감정이 시를 통해 전해져 옵니다. 정치인으로써 행보를 이어갈 때 조지훈 시인이 자주 읊곤 했다 전하는 시입니다. 약간 얼얼해 술에 취한 채로, 높은 툇마루에 앉아 피리를 불며 노래하듯 읊는 시인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조지훈 시 박찬석 곡 [피리를 불면]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6월 25일 방송>
2. “바울의 자기 권위에 대한 소신(1-18절)”을 읽었습니다. 요즘 교육계에서는 심상치 않은 파열음이 일어나고 있다합니다. 학생들의 인권은 신장되는데 반해 교사들의 교권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교사에게 반말은 오래 전의 얘기이고 교사를 구타하는 일이 왕왕 벌어지고 있어서, 철밥통 직군이라 기뻐하던 얘기는 싹 가시고 말았다 합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서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부모의 권위도, 지도자들의 권위도, 목사의 권위도 사정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노 장로님이 계셨는데, 주일이면 천 원짜리 몇 장을 준비해 오셔서, 손주들을 불러 한 장씩 주셨습니다. 손자 손녀들에게 인사를 받는 수단이면서, 할아버지의 자리를 유지하는 방법이라며 씁쓸해 하셨습니다. “행복한 노후생활”을 강연하는 한 강사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생전에 유산을 물려주지 말고 오히려 돈 자랑을 하라고 얘기하십니다. 그래야 노후에 부모의 체통을 지키고 존중받으며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권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루터 신학자 리츌은 권위란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를 말한다 했습니다. 그러니 높은 벼슬아치나 부모나 선생이어서가 아니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권위가 생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크리스천으로써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전략이 필요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도에 대한 악의적인 비난에 대해서 사도가 변명하는 일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그런 악의적으로 헐뜯는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관용을 베풀지 않고 강하게 대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밝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교제하는 성도들에게 보여준 유순함과는 너무 다른 양면성 때문에 당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분명하면서도 단호한 태도를 말씀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들과 세속적인 무기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의 무기로 대항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언제나 우리를 좌절시키는 가장 힘든 문제는 신앙을 가장한 사이비 무리들과의 싸움입니다. 같은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같은 기독교 역사와 신학을 주장하면서 달려드는 싸움꾼들 말입니다. 이런 현상은 성경해석상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문제입니다. 성경 해석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주석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의적(恣意的)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주석은 본문 자체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지를 문자적 역사적 맥락에서 찾아보는 방법으로 exegesis라고 부릅니다. 이에 반해서 자의적 해석이란 해석자의 전제나 사상 그리고 선입관 등을 성경 본문에 반영시키는 방법으로 eisegesis라고 부릅니다. 전자가 본문 자체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에 반해서, 후자는 해석자의 의도가 강조되어 본문의 의미가 왜곡(歪曲) 내지는 윤색(潤色)될 수 있다 하겠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exegesis에 의한 설교보다는 eisegesis에 의한 설교가 넘쳐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12절은 이런 현상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서울의 유명하고 건전하다는 교회들의 TV설교는 시종일관 기복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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