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16호(2023. 11. 14. 화요일).
시편 시 31:4-6.
찬송 44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감정이 결코 변하지 않는다면, 덕분에 한번 먹은 마음이 변하는 일이 없다면, 음악이나 문학 같은 예술이 지금처럼 크게 발전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고통을 겪을 가능성이 줄어든 만큼, 인간의 삶은 좀 더 평화로웠겠지요. 하지만 그 때문에 우리는 성장이나 성숙이라는 말의 의미를 결코 알지 못했을 겁니다. 지난 시간에 대한 후회, 경솔했던 선택에 대한 반성도 결코 존재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지요.
“저 먼 산 위에는 해는 저물고, 기러기 우는 밤길을 헤맨다. 아, 그리워 너의 모습. 너를 못 잊어, 나는 우노라. 아, 돌아 오렴아, 내 그리운 그대. 내 품에 오렴아, 내 사랑 나의 님아, 너를 부른다. 아, 돌아와. 저녁 동산에서 너와 헤어지고. 멀리 떠나간 네 모습 나는 그린다. 아, 그리워 너의 모습, 너는 어디서 울고 서 있나? 아, 돌아 오렴아, 내 그리운 그대. 영원한 사랑아, 애타게 부르노라. 너는 듣는가? 아, 돌아와.”
어떤 진실은 너무 뒤 늦게 깨달아 버린 곤 합니다. 나에게 보낸 편지가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도착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편지를 채 다 읽지도 못하고 두 볼엔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흐릅니다만, 지난 시간은 이미 돌이킬 수 없지요. 작곡가 김 노현은 쉰이 넘어서 만학/晩學으로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선지 김 노현의 작품들은 산등성이를 넘어 서서히 길을 내려오는 사람만의 간절한 회한/悔恨이 느껴지지요. 떠나간 연인, 갈 수 없는 고향, 다시 볼 수 없는 어머니. 작곡가가 돌이키고 싶은 것은, 어쩌면 지난 시간 안의 모든 것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 노현 작사 작곡 <돌아 오렴아>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1월 13일 방송>
2. “단식하며 죄를 뉘우치다2(26-38절)”을 읽었습니다. 초막절 율법 낭독이 매일 6시간씩이나 진행되었는데, 어제 읽었던 내용과 오늘 내용을 7일 동안 내내 되풀이해서 읽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자녀를 교육하거나 성전에서 가르치는 방식을 따른다면, 한두 번 읽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 6:4-9에 나오는 쉐마 교리는 수도 없이 되풀이 하는 방식을 따르고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풀이 방식의 교육을 시행하였을까요? 서울 월계동에 있는 한 교회에서 목회하셨던 이종훈목사님이 들려주신 일화인데, 자신은 성경을 공부할 때마다 구호를 외쳤다고 했습니다. 오른 손 주먹을 불끈 쥐게 하고, “배울 바에는 확실하게 배우자. 배울 바에는 알도록 배우자. 배울 바에는 실천하도록 배우자. 배울 바에는 축복받도록 배우자.”라고 목소리를 맞춰 외치게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서울 여자대학에서 가르치시는 여자 교수님이 목사님을 면담하는 자리에서, “죄송하지만 몇 달째 구호를 외치게 하시는데, 둘러보니 한두 번 들으면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할만 한 분들인데, 이제 그만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더랍니다. 그래서 한참을 책상만 바라보던 목사님은 고개를 들고 “교육은 반복입니다. 실천할 때까지는요.”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유대인의 교육이 위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하게 알도록 실천하도록 축복받도록 배우지 않으면 헛것이니까요.
회개가 중요합니다만, 제대로 된 회개를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고쳐도 제대로 고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엇나가고 반항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수들의 손에 사랑하는 자녀들을 맡기셔서 채찍을 들게 하신 것입니다. 못 견디어 부르짖기만 하면 불쌍한 생각이 드셔서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나 한숨 돌릴 만하면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하나님께 거슬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다시 채찍을 드시고, 아무리 타이르고 꾸짖어도 그것은 한 순간으로 끝나버렸습니다 임금으로부터 대신들 사제들이 모두 한통속이 되어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오랜 옛날 이집트에서 당했던 종살이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완전하게 되돌아서는 행동입니다. 입으로 하는 뉘우침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고 행실을 바꾸고 삶을 바꾸는 일이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용서도 가볍게 “앞으로 잘 해!”라는 당부가 아닙니다. 지우개로 말끔히 과거의 못된 삶을 지우는 일입니다.
3. 묵상식구 중에는 조선족 형제도 있어서 한자를 부기/附記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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