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254(2023. 12. 22. 금요일).

시편 시 36:11-12.

찬송 3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름난 산을 가다보면 흔들다리를 지나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리 아래로 보이는 가파른 계곡은 공포의 대상일 수밖에 없지요. 출렁다리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흔들다리는 사람이 발을 올려놓는 순간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이 고비일 수 있지요. 의연하게 마음을 먹고 차분하게 발을 떼면 아무 일도 없습니다만, 겁을 먹는 순간 결과는 달라집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하고 결국 그 진동은 다리 전체를 점점 더 세게 흔들게 되지요.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마음을 위로하는 일일 겁니다.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이제 곧 다 지나갈 거라고 말이지요. 그 어떤 용기보다 강한 것, 어쩌면 그것은 마음의 평화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창 때에는 등산에 있어서도, 산을 오르는 일이 더 즐거웠습니다. 계속 위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고, 점점 높은 곳에 다다르는 것이 신났지요. 정상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주는 희열 때문에 등산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등산이 지닌 수많은 재미 가운데 하나이긴 하지요. 그런데 요즘은 또 다른 의미를 찾았습니다. 오르는 것 보다는 내려오는 것이 더 위험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떠났던 자리로 어떻게 돌아오는 지는, 산을 오르는 것이 지닌 의미를 완성합니다. 태어났던 자리로 잘 돌아가는 것이, 우리 생의 의미를 완성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1220일 방송>

 

2. “단식은 왜 하는가?(7:8-14)”새 날을 약속하심(8:1-8)”을 읽었습니다. 제가 읽는 공동번역 성경은 슥 1:1-14단식은 왜 하는가?”란 표제어를 붙인 반면에 개역 개정판에서는 1-7절을 여호와께서는 금식보다 청종을 원하신다, 8-14절을 사로 잡혀가는 까닭으로 표제어를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은 개역 개정판을 따라 사로잡혀가는 까닭이란 단락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어제 모 일간지에는 학생 인권조례 악용에 다수가 피햬라는 제목으로, 교권 강화를 골자로 하는 개정을 요구하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우리말에 조삼모사朝三暮四 라는 말이 있는데, 충분한 생각과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간사하게 꾀를 부려 남을 속이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분명히 문제가 있어서 생긴 조례일 텐데, 부작용이 있다고 해서 통째로 뒤집어엎는 일이 생긴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며, 다시금 대화를 통해 설득하고 보완하는 과정이 절실함을 깨우치게 합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나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처사에 대해서 고개를 가로 젓는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너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차갑다고 느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안 듣기로서는 70년 동안이나 노예로 끌려가게 내버려둘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모가 아니면 도라는 식의 사고방식이나, 대화나 소통이 불가능할 때 사용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주목을 끄는 말씀은, 13절의 내용으로 야훼께서 아무리 불러도 사람들이 듣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 눈을 떠야 합니다. “아무리 불러도, 아무리 부르짖어도”, 야훼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자신의 중심을 전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거부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소통의 문제를 심각하게 방해하는 묵직한 돌덩어리가 얹어져 있다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그것은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신의를 지키려거나 사랑하지 않으며, 힘없는 과부나 영세민 고아들을 억누르고, 동족끼리 해칠 마음을 품고 있어서 그리 말라 아무리 말해도 듣기는커녕 외면하고 귀를 막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행위를 사람답지 못한 태도라고 정의합니다. 뜻밖의 불행을 당한 이웃을 바라보면서도 눈 감아버린다거나, 불의하고 불공정한 일을 오히려 정의처럼 둔갑하는 세상을 애써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귀담아 들어주실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통이란 그저 쌍방이 자신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소통이란 의미가 있는 대화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화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대화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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