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70(2024. 7. 25. 목요일).

시편 74:16-18.

찬송 57.

 

1.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펜데믹 이후에 교회로 돌아온 크리스천은 불과 50%를 밑돈다고 걱정입니다. 그래서 뜻있는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해졌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해 보자는 것입니다. 1시간 경건하게 예배를 드리는 일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저의 경우는 어떤 예배를 드려야하는가 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들이 드려온 예배가 얼마나 성실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 설교가 얼마나 부실했는가에 대해서, 기도가 무당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해서 등 등 말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은,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 곧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직도 인상적인 미국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주일 설교를 마친 목사님은 광고를 합니다. 예배는 마쳤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셔서 식사하신 후 집짓는데 필요한 장비들을 들고 오후 2시에 교회에 모여 주십시오. 우리 마을에 이사 온 호주 이민을 위한 집 한 채를 지어드리려고 합니다. 작업복도 잘 챙겨 입고 오시기 바랍니다. 다른 준비는 다 되어 있습니다.

 

2. “예수를 죽일 음모(1-5)”,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자(6-13)”배반을 약속한 유다(13-1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인생여정을 꾸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제가 초등학생 시절에 어머니를 따라서 새벽 기도회를 다녔는데, 딱히 할 일도 없고 해서 이른 아침 교회 종지기로 나서는 어머니 손을 잡고 교회당에 엎드렸다가 한 숨 자고 나면 어머니가 깨워서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긴 했지만, 그게 그냥 좋았습니다. 그것이 아침형 인간을 만드는데 큰 몫을 한 것 같습니다. 이렇듯 반복되는 일상이 습관을 만들고 그 습관이 삶의 틀을 형성하는데 크게 일조를 한 셈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이랄지 문화랄지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거창한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 혹은 한 집단이 어떤 일에 길이 들고 습관이 되는 결과로 얻어지는 열매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장례문화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시신에 향유를 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아직 주님은 살아계셨다는 것입니다. 향유를 부을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마태복음서 기자는 이를 예수님에게 소급 적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단한 혜안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터진 논쟁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향유를 뿌린 베다니의 한 여인의 행위에 대해서, 분개한 사람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신성한 전통에 대해서 딴지를 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가룟 사람 유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은 30량에 팔아먹을 바로 그 사람 말입니다. 이 평행귀는 요 12:1-8에 있습니다. 그 딴지란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은 놀랍게도 전통을 지키는 쪽으로 손을 드신 것입니다. “왜 이 여자를 괴롭히느냐? <중략>.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베다니의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일어났던 향유 한 옥합을 주님께 부었던 사건은, 복음과 함께 전해지고 증거될 사건이 된 것입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주님에 의해 전해진 복음은 한 여인의 헌신을 빛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여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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