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529호.
시편 83:5-8.
찬송 37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무언가 해보고 싶은 일에 대한 가장 간단한 답은 해 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문/自問한다. 혼자 여행하고 싶은데 할 수 있을까? 능력이 없는데 될까? 시간이 없는데 될까? 돈이 없는데 될까? 될까 안 될까 고민하지 말고, 일단 시작하라. 그러면 알게 된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48.
2. 성령강림절 후 열 여덟째 주일의 구약성경 렘 11:18-23을 본문으로 “절망에서 희망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평화의 시대인가? 아니면 공포의 시대인가? 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학교와 병원이 포탄으로 부서지는 장면이나 죽은 시체들이 광장에 뒹굴고 있는 장면이 TV화면에 비추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예언자 예레미야를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18-19절).
세상이 변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세상이 변했습니다. 성전 봉사를 소명으로 알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정들을 지키기 위해서 거룩한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제사장들이 예언자 예레미야를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우상숭배와 배교자들이 판을 치고 있는 시대에, 혜성처럼 나타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적극적으로 지지와 참여하였습니다(11:1-8). 그러나 병든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우상숭배의 맛에 길든 나머지 종교개혁의 변화를 반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신실한 사람들이 물질의 맛, 권력의 맛, 명예의 맛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는 까닭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반해, 우상을 섬기는 것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겠다는 거짓 선동에 따라가는 불신앙의 삶을 살게 합니다. 우상은 인간에게 달콤한 유혹으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게 합니다.
예레미야는 생명을 담보로 우상숭배를 강요당하였습니다(20-21절).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에 민주화와 산업화의 두 과제를 달성했다고 해서 세계로부터 찬사를 듣고 있습니다. 민주화의 과정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습니다. 모란 공원에 가면 그 주역들의 자취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시민들의 성원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예레미야는 생명을 담보로 무서운 협박을 하였습니다. “죽지 않으려거든 야훼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지 말라.” 예레미야는 더 이상 자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나 용기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마음속에만 붙잡아 두려고 해도 그의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이글거려서 가만히 있으면 죽을 것 같아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거짓과 불순종 그리고 우상숭배를 멈추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목 놓아 외쳤습니다.
철저한 멸망을 예고한 것은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22-23절).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야훼의 선언은 추상과 같았습니다. “장정들은 칼에 맞아 죽고, 아들과 딸들은 굶어죽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려 벌하는 날, 살아남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야훼의 선언은 절망 중의 절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살아남을 자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는 말씀 속에 들어 있습니다. 사실 예언자는 유대나라의 멸망과 유대인의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야훼께 돌아오라는 경고로 선포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선포된 말씀은 야훼 하나님 자신의 말씀입니다. 더 이상 경고성 말씀이 아니며, 더 이상 정신 차리라는 훈계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실행에 옮기시기 직전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온 세상이 캄캄한 그믐밤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엎드릴 때이며, 야훼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짖고 의지할 때입니다. 희망의 새 아침이 동터오는 시간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빛나는 아침까지 기다려주실 것입니다. 온 백성이 회개하고 부르짖을 때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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