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14(2024. 2. 20. 화요일).

시편 시 46:8-11.

찬송 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도 가끔은 휴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마음은 움직임을 계속 멈추질 않아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쉬는 시간이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마음은 몸보다 더 심한 혹사를 당한다 싶기도 합니다. 시인은 그 쉼 없는 마음의 움직임을, 제 주인보다도 먼저 헤아리려 애쓰는 사람이지요. 허공에 떠돌고 있는 여러 언어들 가운데 가장 적당한 말을 골라서, 사람들의 마음에 어울리는 모양으로 시를 빚어나가는 게 시인들의 몫입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동안 조개가 진주를 잉태해 내는 것과 마찬가지겠지요.

    “그대를 찾아감은 그대를 찾아감은/ 인적 없는 산길을 나 홀로 걸어감이요/ 그대를 사랑함은 그대를 사랑함은/ 캄캄한 밤길을 등불 없이 다가감이요/ 오직 나 그대만을 생각하다/ 사랑의 추억으로 외로운 마음 새가 되어/ 나의 뜨락에만 내리는 그 황홀한 어둠속에/ 찬란히 솟을 그 태양 기다려 맞이함이라/ 그대를 찾아감은 그대를 찾아감은/ 풍랑 치는 바다를 나 홀로 헤쳐 가며/ 그대를 사모함은 그대를 사모함은/ 캄캄한 밤바다 등대 없이 나아감이오/ 오직 나 그대만을 그대만을 생각하다/ 사랑의 추억으로 외로운 새가 되어/ 은빛 하늘 아래 비치는 그 황홀한 빛을 따라/ 찬란히 솟을 그 태양 기다려 맞이함이라

    지난 주말 이 곡 <황홀한 기다림>의 노랫말을 쓴 권 선옥 시인의 부음을 전했습니다. 여리고 서정적인 시를 썼던 시인은 쉰둘이라는 안타까운 나이에 벌써 세상을 등졌지요. <별이 보이는 저녁>이나 <흐르는 나날들>처럼, 시인의 글에 곡을 붙인 가곡들은 유독 사람들의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는 내용이 많았습니다. 그녀의 시가 그랬듯 시인은 글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 역시 위로 받았겠지요. 삶과 죽음으로 나뉘는 연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작품을 통해 오래 그를 기억하는 것뿐이겠지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권 선옥 시 황 덕식 곡 <황홀한 기다림>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20일 방송>

 

3. <광고> 며칠 동안 쉬고 싶습니다. 조용히 지내도록 도와 주십시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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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13(2024. 2. 19. 월요일).

시편 시 46:4-7.

찬송 21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개화초기 서양음악을 공부하고 우리 음악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가운데 홍난파가 있습니다. 그는 당시 문화의 불모지라고 할 수 있었던 우리나라에서, 작곡가이자 바이오리니스트 평론가로써 늘 한발 앞서는 행보를 보이곤 했었지요. 하지만 아내와의 사별과 당시 어두운 시대 상황을 겪으면서 홍난파 역시도 남모를 고통을 받고 겪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허무와 비탄의 마음을 홍난파는 음악을 통해서 정화하려 하였지요. 봉선화를 발표하고 그는 한 동안 동요 작곡에만 몰두합니다. 그러나 가곡을 발표하기 시작했을 땐 작품들은 이미 초기의 격정이 잦아든 상태였습니다.

    “두둥실 두리 둥실 배 떠나간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 어기에 뒤이어라 저 노를 저어라/ 순풍에 돛 달고서 어서 떠나자/ 서 산에 해지 면은 달 떠온단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가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작은 나룻배 하나가 달빛 아래 갈대숲을 헤치고 강을 따라가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 한 곡입니다. 배가 물살을 가르는 소리 사공의 노 젖는 소리만 들리는 어느 날 밤에, 조금은 평화로운 분위기가 곡 안에 담겨 있습니다. 봉선화 이후 한 동안 동요와 연주곡만을 써 왔던 홍난파는 이은상의 시에 곡을 붙여 가면서 다시 가곡을 작곡하는 일에 몰두합니다. 이곡 역시 봄처녀 고향생각 사랑과 같은 곡을 발표한 1933<조선가요 작곡집>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졌습니다. 함 호영 시 홍난파 곡 <사공의 노래>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18일 방송>

 

2. “인사(1-9)”고린도 교회의 분열(10-17)”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1세기 초대교회에서 일어났던 분파주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의견을 통일시켜 갈라지지 않고 같은 생각 같은 뜻으로 굳게 단합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글로에의 집안사람들에 의해서 들리는 얘기로는 다툼이 커서 아예 파벌다툼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파벌이 전도자들의 이름을 딴 특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 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분파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앙에 큰 영향을 준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정보력이 약한 당시로써는 전도자들이 소수의 사람들을 모이도록 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이며, 더구나 기독교회가 박해를 받는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비밀리에 참석자들을 모아야 했을 테니 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의 남다른 결속력은 분파주의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에게 누가 세례를 베풀었는가 여부에 따라서 분파가 갈리게 되었다는 것은 이런 가능성울 더욱 더 분명하게 합니다. 사도는 세례를 베푼 사람에 의해서 분파가 생기는 문제를 심각하게 취급한 것입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재세례 문제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파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구별 짓고, 물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성령세례를 강권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성지순례단 가운데서는 요단강에 이르러 세례의식을 거행하는 순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재세례를 행한 것입니다. 이런 폐해가 생긴 것은 당시만 하더라도 세례나 성만찬에 대한 이해가 제대로 교육되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었습니다. 더구나 물세례 역시 세례자의 머리 정수리에 물을 뿌리는 것이나 세례 대에 물을 많이 받아두고 침례를 하는 것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세례의 방식에서 벌어진 차이는 곧 바로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첫째는 세례는 세례자가 누구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부와 성령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는 것 말입니다. 둘째는 머리끝에 세례대의 물을 뿌리는 것이나 물속에 머리끝까지 잠기게 하는 것은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문제가 됐던 것은 쿰란 공동체와 같은 일부 초대교회의 종파들 중에는 입교 형식으로 세례를 행하였는데, 그들에게는 성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바울이 세례자에 의해서 교회가 분파로 갈리는 것을 나무랐던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훗날 재세례는 신학적으로 잘못된 가르침으로 규정하였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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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12(2024. 2. 18. 사순절 첫째주일).

시편 시 46:1-3.

찬송 36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늘 자리를 바꾸고 싶어 하는 그런 병에 걸려 있다.”고 프랑스의 작가 알랭드 보통은 이야기합니다. “어딘가로 옮겨가게 될 것을 늘 꿈꾸면서,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지금보다 더 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린 알고 있습니다.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가면 그곳에서는 또 다른 곳을 꿈꾸면서 살아 갈 것이 분명하다는 것 말입니다.” 가장 소중한 건 바로 지금 여기에서의 삶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새겨보면서, 월요일 아침 힘차게 출발해 보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216일 방송>

 

2. 사순절 첫째주일의 사도서간문 약 1:12-18 본문으로 시험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가 사순절을 정하고 지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님께서 어떻게 고통과 시련을 이겨내시고 승리하셨는가를 배우는 것 못지않게, 현재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고난을 어떻게 감당할까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시련은 모든 인생이 피할 수 없는 멍에이면서, 동시에 이겨내야 하는 과제라는 사실입니다(12).

야고보 사도는 행복한 사람이 누군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면류관에 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주제가 엄청난 비중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중심 단어는 시련을 견디어 내거나, 시련을 이긴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하는 시련이라는 낱말은 페이라스몬이란 말로, 시련이라는 말이나 유혹이라는 말로 번역됩니다. 시련과 연단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를, 유혹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나타냄으로 조심스럽게 번역해야 합니다. 시련과 연단을 끈기와 인내로 잘 극복한 사람에게는 행복과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는데 반해서, 수많은 유혹의 덫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은 불행과 수치의 나락에서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것은 시련과 유혹은 모든 사람들 앞에 동일하게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끝까지 참고 이겨내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유혹하거나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13-15).

우리는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누군가 희생양을 만드는 못된 습관이 있습니다. 혼자 책임을 지려니까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 책임전가의 1순위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습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하였습니다. 일이 잘 풀리거나 좋은 일이 생길 때는 자화자찬을 늘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이 늦어졌던 것입니다. 책임소재가 불명확하니까 진단이 잘 안 되었고, 수정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유혹을 받지 않으실 뿐 아니라, 악을 행하도록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거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은 우리들의 욕심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욕심에 빠진 사람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그 스스로 욕심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갈 뿐입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총과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16-18).

우리 크리스천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시련과 유혹으로 힘들어할 때만이 아니라, 일취월장 만사형통하다고 생각할 때 교만해지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남의 꾀에 잘 빠지거나 속임수에 넘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체로 그 자신에게서 사기성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정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얕은꾀에 넘어가거나 속임수에 빠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우들 사이에 서로 불신하고 경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때 어느 대형 교회에서 큰 금융사고가 벌어졌는데, 재력을 과시하고 분에 넘치는 접대를 받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합니다. 상호 신뢰를 기본으로 생각하는 성도들 사이에서 고리대금을 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총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3. 오늘은 도봉루터교회 창립65주년 기념 예배에서 설교를 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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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11(2024. 2. 17. 토요일).

시편 시 45:16-17.

찬송 20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서울 근교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볼 수 있는 곳 중에 양수리가 있습니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가 만나는 곳이라는 뜻에서 양수리라는 이름이 붙여졌지요. 춘천 가는 길과 양평이나 홍천 가는 길이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양수리>의 작곡가 오 숙자도 살고 있는데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전원주택가운데 유난히 야트막한 대문이 있는 집이 작곡가 오 숙자의 집이랍니다. 거실 한 쪽에는 동화처럼 하얀 그랜드 피아노가 있고, 그 곁에는 악보와 가곡을 위한 시들이 수북이 쌓여 있지요.

    “세월의 언덕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을/ 억새는 아직도 멈추지 못하는가/ 겨울이 와도 못 다한/ 그리움의 속울음을 버리지 못하는가/ 있는 그곳 볼 수 없어/ 마음 멀리 보내주면 그리움이려니/ 아 아무것도 베풀 수 없어 가슴시릴 때/ 어루만질 손길 있다면 그리움이려니/ 아 그리워할수록 사랑은 어렵고/ 가슴은 아프네.”

    작곡가는 지금의 시대를 만남의 시대라 말하곤 했습니다. 미술과 음악 음악과 문학, 그리고 서로 다른 음악의 장르들이 하나로 만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바로 지금이라 말을 했지요. 서로 화합하고 융화하는 그러한 작업을 하기 위해서, 곡을 쓰는 것이라고 작곡가 오 숙자는 말했습니다. <원술랑> <동방의 가인 황진이> 같은 오페라 작품 역시 그러한 인생관과 음악관 안에서 만들어졌지요. 조금은 색다른 느낌의 가곡도 있습니다만, 작곡가 오 숙자의 작품들은 그의 인생관을 닮아 온화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 병선 시 오 숙자 곡 <바람이 가는 곳에>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17일 방송>

 

2.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다3(20-26)”을 읽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기도의 대상들은 폭이 넓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다고 한다면, 오늘 기도의 대상은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제자들 뿐 아니라 제자들의 제자들까지도 모두 다 하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가 되는 방법으로 제안한 말씀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계시고, 당신이 하나님 안에 있는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 안에라는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부분 여격을 지배하는 전치사로 사용되고 있는데, 몇 가지 용례를 보면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14:11),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15:5) 등과 같이 신뢰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며, 바울 사도의 전형적인 관용구인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이란 말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된 그리스도인의 존재양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의 제자들까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와 온전한 하나로 연결되고 묶여 있음을 의미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 됨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느냐는 물음 앞에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객관적인 설명을 요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신비현상을 체험했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신비 체험은 매우 주관적이어서 60여 년 전 저의 고향교회 오권사님은 매일 천국을 다녀오는 신비한 꿈을 꾸셨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헤어지는 신작로에 연결된 큰 교량 앞에서 한 시간이 넘게 천국 얘기를 하셨습니다. 온갖 화려한 비단 옷과 보물들이 가득한 천국이라면서 말입니다. 저의 세 번째 교회인 부산에서는 고기잡이배에 얽힌 꿈들을 가지고 해몽을 구하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씀은 사람마다 이해의 정도가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된 감격과 기쁨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이 임하실 때, 성령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과 영과 혼을 감화 감동시키는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일이란 우리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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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10(2024. 2. 16. 금요일).

시편 시 45:13-15.

찬송 2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쌓인 눈 위를 가장 먼저 밟았던 기억이 누구나 한 번쯤은 있을 겁니다. 새 하얗게 쌓인 눈 위로 지나가는 게 미안해서 머뭇거리다가 어쩔 수 없이 첫 발을 내 디뎠을 때, 마음엔 묘한 상실감 같은 것이 들곤 했습니다. 눈으로 온통 하얗게 덮인 길을 보면서, 두려운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눈으로 덮인 세상은 내가 발을 딛는 곳을 새로운 길로 만들어 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발을 재촉하다가 뒤를 돌아보면 눈 위엔 오직 내 발자국만이 남아 있습니다. 새로운 길이 될 수도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지닌 나의 흔적들이겠지요.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국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 내 작은 마음이 하얗게 물들 때까지/ 새 하얀 산길을 헤매고 싶소/ 외로운 겨울 새 소리 멀리서 들려오면/ 내 공상에 파문 일어 갈 길을 잃어버리오/ 가슴에 새겨보리라 순결한 임의 목소리/ 바람결에 실려 오는 가 흰 눈 되어 온다오/ 저 멀리 숲 사이로 내 마음은 달려가나/ 아 겨울새 보이지 않고 흰 여운만 남아 있다오/ 눈 감고 들어보리라 끝없는 임의 노래/ 나 어느새 흰 눈 되어 산길 걸어간다오

    눈이 하얗게 덮인 풍경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 가곡 팬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곡이 바로 이 곡 <>이 아닐까요? 노랫말과 음악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참 서정적으로 다가오는 그러한 곡입니다. 김 효근은 이 작품으로 1981년 대학 가곡 제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작곡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만, 본래의 전공을 살려 지금은 경제학자이자 경영학부의 교수로 남아 있습니다. 작곡가로써의 꿈을 버린 것은 아니기에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만, 덕분에 다작은 하고 있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에겐 더 귀하고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김 효근 작사 작곡 <>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16일 방송>

 

2.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다2(9-19)”을 읽었습니다. 은퇴를 하고 달라진 저의 생활 중 하나는 기도해 주십시오.”라는 부탁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기도의 부탁을 하는 목적이 애매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느끼는 경우는 거의 100%가 경제적인 도움을 청하는 것으로 들렸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라고 할 때, 이것은 중보기도를 의미합니다. 중보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서 계시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였습니다(딤전 2:5). 그러니 중보기도란 누구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때로는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전 만나 본적도 없는 사람을 위해서 진정성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뿐 아니라, 매우 조심스럽기까지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우리에게 중보자로써 유일하면서도 가장 적절하게 중보해 주실 분이란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기도가 아니라, 특정한 사람들 다시 말하면 이름은 물론 성격과 취미 그리고 많은 대화와 생활을 통해 얻은 풍부한 정보를 알고 있는 당신의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점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한 편의 영화처럼 수많은 이야기들이 떠오르는 사랑하는 사람들, 크고 작은 임무를 맡길 때마다 잘 감당했던 제자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토록 간절한 마음으로 중보 했던 기도의 말씀은, 고작 그들의 신앙과 신념을 지켜주시라는 것이었습니다(11). 하늘나라의 비밀을 알려주고, 그 무거운 멍에를 짊어질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고 싶어 하셨던 것은 화수분과 같은 보물 상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아니면 혼란에 빠진 어지러운 시절에 권력의 자리를 꿰차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떠나고 외롭게 남게 될 제자들의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붙잡아 줄 힘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들이 하나가 될 것을 기도하신 것입니다(11). 누군가 여러 사람을 향해 하나가 되라고 권고한다면, 이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단일화나 통일의 개념이(unification) 아니라, 저마다의 특이한 재능과 속성을 가지면서 함께 모일 때 조화를 이루는(harmony)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말씀 안에서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구하신 것입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부모의 유언을 들으려고 임종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이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는 분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래서 오랜 시간 생각하고 생각한 후에 몇 마디를 남기는데, 그리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합니다. 많은 자식들을 향해서 어머니 잘 모시고 형제 우애하며 살라든지, 신앙생활 더욱 열심히 하라는 부탁 등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 안에서 기쁨이 충만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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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09(2024. 2. 15. 목요일).

시편 시 45:10-12.

찬송 51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한 해의 시작을 봄이 시작되는 3월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2월을 한 해의 마지막 달이라 생각을 했지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달에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마을의 중심에 모였습니다. 양이나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것으로 한 해 동안 저지른 죄를 신에게 용서받기 위해서였지요. 매년 215일 고대 로마의 생일이었던 이 의식을 그들은 페브르와라 불렀습니다. 이제 2월을 한 해의 마지막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만, 누군가를 다치게 했던 말들, 부주의함이 불러온 실수,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얼룩이 있다면, 조금은 경건한 마음으로 그러한 얼룩을 지워나가고 싶습니다.

    각 달을 우리말로 표현한 달력에서 2월은 시샘 달이라 부르더군요. 해 소심 달, 물오름 달 잎새 달 그 달마다 많은 별칭을 붙였습니다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은 이 시샘달인듯 합니다. 잎샘 추위와 꽃 샘 추위가 있는 달이라고 해서 2월을 시샘달이라 이름 붙였다고 하는데요. 나뭇잎이나 꽃봉오리가 나오기 전에 날씨도 샘을 낸다는 상상이 재미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동화나 오랜 옛 이야기 같기도 하고 말이지요. 시샘달이라는 말처럼 2월의 날씨는 유난히 변덕스럽지요. 벌써 봄인가 싶다가도 이내 차가워지곤 합니다. 그래도 겨울의 뒷모습이 많이 보이지요? 서서히 새로운 계절에게 자연을 내 주는 그 모습 말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15일 방송>

 

2. “예수님의 기도(1-8)”을 읽었습니다. 지난 5일부터 13일까지 저는 건대병원 82병동 17호실에서 전립선암이란 진단을 받고 전립선 제거 치료를 하였습니다. 처음 계획은 2일 입원 8일 퇴원하는 일정이었으나 제가 지켜야 할 금지약을 복용한 때문에, 일정이 변경된 것입니다. 옛말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는데, 조직검사 결과가 너무 좋아서 제가 지킬 준비과정을 송두리째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연휴로 인해 이틀씩이나 병원 신세를 더 지게 된 것입니다. 치료과정과 결과는 아주 좋았습니다. 현명하고 성실한 의료진은 물론, 5인 병동의 이웃들도 모두 서로를 배려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드린 기도는 보기 드물게 기도에 관한 여러 주제에 대해서, 그리고 매우 구체적인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배우고 깨우칠 내용이 풍부하다 하겠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기도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린 기도라는 것입니다(1).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기도하셨다 말씀합니다. 유독 우리나라 크리스천들은 눈을 감고 머리를 땅으로 향해서 기도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기도의 문제가 시작되는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매달 첫주일에 설교하는 농인교회 교인들은 모든 교인들이 눈을 뜨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수화 통역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생각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 영화로운 분으로 여김 받도록 구하고 있습니다(2-5). 마치 <주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 우리들 기도에서는 눈을 씻고 찾아도 찾아낼 수 없는 기도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기도는 주님 자신뿐 아니라 우리들 역시도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를 분명하게 정리해 주고 계십니다(6-8). 그것은 저마다의 역할을 제대로 인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뽑아 맡겨주신 사람들(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키라고 하는 일이었는데, 그 임무를 잘 수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헛소리를 하는 자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자들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행태 역시도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와 한 병실에 입원한 분의 가족은 오래된 이단자 안 상홍 집단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안 상홍이란 자 역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 칭한 자로, 67세라는 한참 나이에 죽었는데, 자신을 제2의 메시아라 칭하고 다녔던 자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지도자들도 예외없이 자신이 하나님이라도 된 듯 팔자걸음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은 물론이고 목소리며 눈동자, 내뱉는 말씨나 풍기는 인품에선 하나님의 일꾼다운 순종과 겸손의 모습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여전히 인류의 시조 아담과 같이 저마다 하나님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삶의 의미란 주제를 가지고 고민해 본적 없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삶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높이 오르는 것도, 많이 누리는 것도, 영생불사를 목표로 사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세상 사람들의 헛된 꿈일 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삶이었습니다(22:34-40).

 

3. 안 상홍은 저의 고향 마을 명덕리의 폐광촌에서 태어나 안식교에 심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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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08(2024. 2. 14. 수요일).

시편 시 45:7-9.

찬송 48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거리를 지나는 몇몇 사람들의 손에 들린 바구니와 선물 꾸러미를 봤습니다. 꾸러미의 크기로 보면 손바닥만 한 초콜릿을 건네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나 짐작하게 되더군요. 아무리 보이지 않는 마음입니다만, 반드시 물건으로 표현을 하고 내 보여야만 할까 의문이 들기도 하고 말입니다. “표현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누군가는 말하기도 합니다만, 하지만 진정 사랑이란 그 어떤 대상으로 대신하거나 형상화할 수 없을 만큼 너른 거이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히 없어라/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 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마음/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위에 주름이 가득/ 땅 위의 그 무엇이 높다하리요/ 어머님의 정성은 지극하여라/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머니의 마음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오/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앞 서 노랫말을 듣고 익숙한 곡을 상상하셨던 분들은 조금 당황하셨겠다 짐작되네요. 이 곡의 노랫말은 국문학자 양주동이 쓴 <어머니의 마음> 과 같습니다. 양주동 선생의 글에 젊은 작곡가 조 성원이 새롭게 곡을 붙여 완성한 곡인데요. 과천 시립 여성 합창단의 상임 지휘자인 김희철과 작곡가 조성원이 <어머니>라는 테마로 함께 했던 연주회에서 선보인 곡입니다.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친숙한 노랫말에, 새로운 곡을 붙인다는 것은 아마도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겠지요. 그렇지만 바로 그러한 점이 이 곡을 색다르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양 주동 시 조 성원 곡 <어머니>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14일 방송>

 

2.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9-14)”을 읽었습니다. 기도란 참 어렵고 힘든 신앙생활의 하나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기도를 잘 하는 분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저의 모친이 기도를 잘 하셨다 고향 교인들은 기억합니다. 성경을 1년에 4차례나 통독하셨다니까 그런지 기도의 적재적소에 성경구절이 인용되곤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제가 출석하는 교회 중 한 곳의 담임목사님도 기도를 참 잘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도에 대해서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사들 중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즉석기도를 부탁받고 사양하시는 분들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누가복음서 기자가 이런 우리들을 위해서 바로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라는 일화로 매우 귀한 자료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회수요일이어서 우리가 복을 받은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파 사람은 기도할 때가 제일 신나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모든 기억을 동원한 기도를 하였기 에 언제나 기도의 청중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세리의 기도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장 부끄러운 점들에 대해서 기도할 생각을 하니까 어디 구석진 골방이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기어들어가는 작은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두 사람의 기도 모습을 지켜보시는 분이 계셨으니, 그 분은 우리 주님이셨습니다.

    펜스테이트 대학의 사회학 교수 쌤 리처드는 동 서양의 성격을 비교하는 실험 교실을 가졌습니다. 두 여학생이 교단으로 세워졌고, 교수는 두 학생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자네는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하느냐?” 미국 여학생은 긍정적으로 대답했고, 한국 여학생은 별로라고 생각한대 대답했습니다. 다음 질문은 학점이 얼마냐?”에 대해서 미국학생은 3.0을 넘는다고 했는데, 한국 학생은 대답을 꺼리며 몸을 비틉니다. 교수가 귀를 학생 입에 갔다대며 자신만 알겠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교수는 3.6이라고 학생을 대신해서 폭로합니다. 이윽고 자네들은 몇 학년인가?”하고 묻습니다. 두 학생 모두 2학년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학생은 2학년이지만 가을 학기에 4학년 학점을 모두 따서 졸업할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강의실 안에서는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2년 만에 4년 과정을 마칠 예정이라는 학생의 점수는 탁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에게 겸손할 뿐 아니라 소극적이었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인이기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타인을 의식하지 않는 바른 기도는 진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쁘면 기쁘다고 하고, 마음이 상하면 상했다고, 절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그리고 믿음조차 찾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런 사람과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때문입니다.

 

3. 오늘은 성회수요일로 오늘부터 사순절 기간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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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07(2024. 2. 13. 화요일).

시편 시 45:4-6.

찬송 44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고요함은 그 어떤 것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합니다. 먼저 나서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지 않는 것만으로, 자연은 큰 위로를 건네주지요. 그런 자연 안에서 위로를 얻고 삶의 방향을 되짚어 나가는 일은, 이제 아주 오래된 우리의 관습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청산의 심상을 담은 가곡을 좋아하는 것도 아마 그러한 이유이겠지요.

    “청산은 깊어 좋아라/ 말이 없어 더욱 좋아라/ 말없는 청산 데리고 나 이렇게 혼자 사노라/ 강물은 맑아 좋아라/ 잔잔해 더욱 좋아라/ 흐르는 강물 데리고 나 이렇게 잊혀 사노라/ 영 넘어 둥실 흰 구름 고운님 손짓이어라/ 솔바람 칡덮사이로 밝은 달 더욱 좋아라/ 저 멀리 흰 돛단배 그 이가 오심이어라/ 정다운 강산 데리고/ 나 이렇게 즐겨 사노라.”

    작곡가 한 지영의 <청산은> 그리고 작곡가 김 연준의 <청산에 살리라>와 더불어 사랑받고 있는 곡입니다. 세 작품이 담아내고 있는 청산의 푸르고 싱그러운 심상이 노래를 드는 것만으로도 전해집니다. 노랫말 가운데 등장을 하는 <칡덮>이라는 말은 익숙한 단어가 아닙니다. 칡덤불이나 칡넝쿨을 상징하는 시어인데요. 운율을 위해 사용됐다고 합니다. 송 운은 전남 익산에서 원심 합창단을 만들고 지휘자로 활동해 왔지요. 원광대학교 음악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해 오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지난 2002년 가곡 발표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이 공전 시 송 운 곡 <청산은 깊어 좋아라>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213일 방송>

 

2. “빌라도 앞에 서신 예수(28-38)”을 읽었습니다. 우리 인류 역사에서 가장 나쁜 인간을 꼽으라고 한다면 수천만의 자기 동족을 죽인 스탈린일까요? 아니면 유태인만 6백만 명을 죽이고 자국인과 또 다른 백성들을 수백만이나 죽인 히틀러일까요? 그런데 수 억 명에 달하는 크리스천들이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예배드릴 때마다 그 이름을 불러내는 빌라도는 어떨까요? 그런데 빌라도가 스탈린이나 히틀러처럼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살인을 저질렀던 인물이 아닌데도 그들보다도 더 악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서 억울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빌라도의 재판을 읽으면서 빌라도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고발했지만, 빌라도는 고발장을 읽기 전에 무슨 죄로 고발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리곤 고발자들의 법대로 치리할 것을 명합니다. 빌라도는 정치인으로 종교적인 분쟁에 간여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힌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인들의 해괴한 진술을 듣습니다. 자신들에게는 사형시킬 권한이 없어서 고발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빌라도는 정치적인 반란자들의 문제로 인식하고 예수께 첫 질문을 합니다. “그대가 왕인가?” 예수님의 대답은 그 질문이 당신의 질문인지, 고발자들의 질문인지를 말해 달라 합니다. 세 번째 빌라도는 비로소 재판관다운 질문을 시작합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느냐고 말입니다. 동문서답하듯 예수님은 내 왕국은 이 세상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정치적인 세력을 대표하는 왕이냐고 거듭 질문합니다. 그때 주님은 진리를 전하려고 이 세상에 왔다고 말합니다. 네 번째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빌라도는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로마에서 공부하고 경력을 쌓아온 전형적인 정치가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재판을 앞두고 고민했다는 공관복음서의 기록물들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고발한 사건을 헤롯에게 넘기기도 하고, 예수를 살리기 위해서 실제 정치 선동가인 바라바를 내세우기도 합니다. 빌라도는 자기 아내의 충고로 최악의 재판을 막아보려 했고, 그리고 마침내 죄를 찾지 못했노라며, 그의 피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고 공언(公言)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치주의를 입버릇처럼 뇌이던 빌라도는 가장 무기력한 비법치주의자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는 공정과 상식에 따른 판결이 아니라 고발자들의 요청에 굴복하고 그들의 요구대로 사형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빌라도는 스탈린이나 히틀러에 비하면 훨씬 유순한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죄목은 비겁함이었습니다. 비겁함은 배신의 중심 내용으로, 그는 숭고한 법의 정신과 목적을 배신하였고, 자신과 가까운 가족의 양심과 선의를 배신하였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배신한 것입니다. 1910년 한일합방을 막아보려고 일국의 왕(순종)의 계비인 순정효황후가 옥새를 치마에 감추자, 황후의 치마를 들추고 옥새를 찾아내 한일 합방의 1등 공신이 된 배신자 윤 덕영(해평 윤씨)을 우리는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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