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54.

시편 시 55:15-17.

찬송 155, 1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노래책을 꺼내 좀이 기어 다니는 책장을 넘기며 노래를 부른다. 햇빛을 향해 뻗던 화초들 줄기가 내가 매일 노래 부르는 쪽으로 휜다.” 양 선희 시인의 <음악 요법>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하는데요. 음악 요법은 절박한 마음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지요. 덤으로 화초들 줄기까지 노래가 들리는 쪽으로 휜다고 했습니다. 화초들이 노래를 더 잘 들어보려고 귀를 쫑긋 세우는 모습, 상상만으로도 참 어여쁘게 느껴지는데요. 이제부터는 우리도 노래 쪽으로 몸이 슬며시 기울어지는 그런 시간이겠지요?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330일 방송>

 

2. 우리 주님의 부활절 복음서는 막 16:1-8, “부활신앙은 최상의 축복이다.”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주변의 목사들은 부활주일 설교가 가장 어렵다고 말하곤 합니다. 부활을 증명하려고 힘쓰는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이란 증명할 수 있을 때만 빛나는 게 아닙니다. 신앙은 성령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며 주신대로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세 여인은 향유를 들고 주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1-4).

제가 목회 4년 차인 어느 초겨울에 부산의대 기독학생회의 수련회 강사로 3일간 양산 통도사 부근의 한 기도원에서 진땀을 흘린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확신이라는 주제로 부탁을 해 왔었습니다. 그때 저는 파스칼의 노름이라는 얘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이며 신학자인 파스칼이 신앙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는 잘 알려진 공식을 소개했습니다. 유대민족을 광야 40년 동안이나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게 하면서 신앙을 훈련했음에도 실패했던 신앙을, 확실하게 공식 하나로 증명함으로 믿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시도는 진행 중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여인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죽은 지 사흘된 시신에 향유를 바르려 무덤을 찾았는데, 무덤 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굴릴까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을 모를 때의 모습입니다.

 

흰옷 입은 젊은이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의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5-6).

태산 같은 걱정은 사라졌습니다. 큰 돌은 굴려져 무덤은 열려 있었고 한 젊은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여인들에게 주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난데없는 청년을 훗날 사람들은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 단어 외에 다른 말을 찾을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천사는 여인들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말들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많은 말들이 생략되어 있지만 다른 복음서들로 보완을 하면,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28:6, 24:6-7). 여자들은 그곳에 머물러 서성거릴 이유가 없어진 것입니다. 어디로 그리고 누구에게 가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를 깨달은 것입니다. 신앙은 증거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주님의 말씀을 회상하거나 기억함으로 출발하고 완성되는 것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을 기억할 때만 창조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24:8) 부활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3:15).

 

부활신앙은 거룩한 두려움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직시하게 만들었습니다(7-8).

두려움이란 말은 헬라어로 포베오(φοβεω 두려워하다)는 동사로 신약성경에서 이 단어가 무려 75%이상 사용되는 수동태 동사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란 존경한다, 경외한다는 의미로도 자주 쓰입니다. 그럼으로 부활신앙이란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밖으로부터 우리를 움직이는 강력한 힘에 의해서 작동하는 능력이었다는 말입니다. 무덤을 찾은 여자들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을 때, 발이 땅에 얼어붙는 것처럼 떨렸고, 이어서 환희의 전율을 느꼈던 것입니다. 성경에는 거룩한 두려움을 체험한 많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 여호수아, 엘리야, 막달라 마리아, 베다니의 마르다와 마리아, 바울과 디모데 등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게 하는 것은 성령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크고 작은 거룩한 두려움을 우리들에게 주십니다.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총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53(2024. 3. 30. 성주간 토요일).

시편 시 55:12-14.

찬송 18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안서 김 억은 김 소월의 스승으로 유명합니다. 그렇지만 소 월의 스승이기에 앞서, 김억 역시도 당대 뛰어난 문인이었습니다. 1923년에 발표를 한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이었고요. 그리고 시집 [오누의 무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번역 시집이었지요. 김 억은 주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의 작품이나 동에나 한시를 번역해 냈습니다. <상사목>이라는 제목이 붙은 황 진이의 시 역시도, 안서 김 억이 번역을 해 우리말로 옮겨냈지요. 번역시입니다만, 황 진이의 시조와는 또 다른 하나의 새로운 작품이 김 억의 손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작곡가 김 성태가 그 시에 곡을 붙였지요. 그 곡이 바로 우리가곡 <>입니다.

    “꿈길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님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금 길 따라 그님을 만나러 가니/ 길 떠났네 그 님은 나를 찾으러/ 밤마다 어긋나는 꿈일랑 이면/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 지고

    시의 분위기가 참으로 애잔합니다. 어떠한 사연인지 정확히는 알진 못해도, 누군가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은 시를 통해 전해지지요. 이 곡의 작곡가는 <동심초> <이별의 노래>를 작곡한 김 성태 선생입니다. 젊은 시절이 어제인 듯 가깝기만 한 듯 시의 분위기처럼 꿈길을 달려온 듯, 작곡가는 올 해로 만 99세인 백수를 맞았습니다. 김 성태 선생은 동요집 [새야 새야 파랑새야] 를 내며 작곡가로 첫 발을 내 디뎠지요. 올해로 작곡가 데뷔 80년을 맞았습니다. 청력이 떨어진 것 외에는 생활의 큰 불편이 없을 만큼 건강하다는 작곡가의 소실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7월에 있을 작곡가 데뷔 80년 기념 연주회에서도 건강히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황 진이 시 김 안서 역시 김 성태 곡 <> 감상하셨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31일 방송>

 

2. “대사제 앞에 서신 예수(57-66)”을 읽었습니다. 유대인 공동체는 산헤드린(συνέδριον)이란 종교 법정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공동체의 규모에 따라서 23-72명의 공의회 의원이 있었습니다. 세 명의 지도자와 69명의 평의회 의원으로 구성하고 있었으며, 주후 70년 로마에 멸망하기 전에는 예루살렘 제2성전 시기에 성전 안뜰에 의회 법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헤드린은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의 자치권과 종교 활동을 보장하는 범위에서 운영되고 있었는데 정치적으로 로마당국에 협조하는 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서 기자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던 중 붙잡은 예수를 대사제 가야바의 사저(私邸)로 끌고 갔을 때는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도망쳤던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는 돌아와 가야바의 뜰까지 숨어들어 경비원들 사이에 끼어서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할 거짓 증거를 찾으려고 증인들을 세웠는데, 적합하지 않아 난처한 지경이었는데, 마침 두 사람이 증인으로 나와서 이 사람이 성전을 헐었다고 사흘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께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예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했습니다. 그러자 대사제는 자신이 품고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대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는 대답과 함께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당신의 말이오. 잘 들으시오. 너희는 이제부터 사람의 아들이 전능하신 분의 오른 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구름을 타고 오늘 것을 볼 것이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대사제는 자신의 겉옷을 찢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고 아우성쳤다고 했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갈릴리 변방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신흥종교 예수의 무리들에 대해서 단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백성들의 눈이 두려워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예수를 죄인처럼 끌고 가서 유대인의 종교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죄목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자칭하며 백성들을 현혹하는 자로 올무에 걸려들게 한 것입니다. 한낱 사이비 종교인에 불과한 한 사람을 제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의 인식은 혹세무민하는 한 신앙공동체에게 철퇴를 가하는 것은 백성들을 혼란에서 구해내는 중요한 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죄와 죽음에서 고통 받는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의 십자가 사건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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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2(2024. 3. 29. 성주간 금요일).

시편 시 55:4-7.

찬송 54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심 보선의 <30> 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30,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다 자랐는데 왜 사냐고 하는 그 시구처럼 서른이 넘으면 다 자란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왜 사냐고 말할 수만은 결코 없는 나이가 30대이지요. 다 자랐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뭔가 해내야 하는 때, 바로 그 때가 30대 아닌가 싶은데요. 3월의 마지막 날 아침, 삼삼한 3월이 이렇게 다 지나간다는 사실이 아쉬워서 일까요? 사랑은 여전히 오고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신열이 몸 들뜨게 될 거라고, 시인에게 대답해 주고 싶어지네요. 4월에는 더 많은 꽃들이 피어날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말입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331일 방송>

 

2. “고난 받는 종의 노래(52:13-53:12)”를 읽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게 달려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 금요일입니다. 보통은 이날은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 말씀(架上七言)을 주제로 설교하는데, 이번에는 이사야의 말씀으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는 남 유다 제10대 왕 웃시야 왕 죽던 해부터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14대 왕 므낫세에 이르기까지 대략 BC 740-680 사이의 60년 기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후 30년과는 무려 700년이라는 간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받은 신탁으로 십자가의 사건을 너무도 생생하게 예언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십자가의 전체적인 모습을 사람들이 그를 보고 기가 막혀 했다.”고 말하며, 사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고, 일찍이 이런 모습은 눈으로 본 사람도, 귀로 들은 사람도 없었다고 (52:13-15) 말합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런 자신의 예언을 곧이곧대로 들어줄 사람이 만무할 것이라 덧붙입니다. 아무도 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이가 없을 것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그 분에게서는 당당하거나 멋진 모습도 없고, 사람들에게 주목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어서, 멸시를 받고 퇴박을 맞아도 불쌍히 여기기는커녕, 우리도 덩달아 그분을 업신여겼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그 분이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을 대신 앓아주셨고, 우리가 받을 고통을 대신 겪어 주신 것입니다. 그가 당연히 천벌을 받고 있거나 하나님께 잘못하여 매를 맞는 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찔림을 우리의 반역죄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채찍을 맞고 상처를 입은 것은 우리를 성하게 고쳐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온갖 굴욕을 겪으시면 서도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명 억울한 재판임에도 걱정해 주는 이 하나도 없고, 폭행을 저지르거나 거짓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죄인들처럼, 불의한 자처럼 처형을 당하고 그들 곁에 묻히셨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야훼께서 뜻이 있어 하신 일로, 자기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내놓은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자기 자신의 의지나 지혜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고사하고 자기 자신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으리라 생각합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으로는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는 죽전만당이라는 곳에 위치했는데, 가파른 언덕길을 숨이 차게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 올라가는 그 곳에 정신이상이신 분이 학교 가는 우리들을 붙잡고 무슨 얘긴가를 하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분이 일본에서 공부를 하신 분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전쟁을 겪으면서 그리 되셨다고 혀를 차곤 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성경말씀을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삿분은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불과 수십 년을 앞서 사신 분에게서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씀이 있었다면, 700년이란 풍상을 겪기도 견디기도 하신 분들의 얘기를 누가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깨우침을 얻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해되지 않는 일일지라도 그것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해 둔다면, 어느 오랜 훗날엔 누군가 그 얘기를 풀어가며 흥미를 느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분명 그런 날이 오리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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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1(2024. 3. 28. 성주간 목요일).

시편 시 55:4-7.

찬송 28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달래 냉이 씀바귀 봄나물 이름을 대라고 하면, 대부분 이 세 가지를 쉽게 얘기하게 되지요. 하지만 그 모습을 제대로 구분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냉이는 겨자과 씀바귀는 국화과 달래는 백합과로, 셋다 소속이 다르다고 하던데요. 뿐만 아니라, 냉이 하나만 하더라도, 다시 여러 가지 다른 종류로 나눈다고 하더군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참 냉이 말고도 다닥 냉이 미나리 냉이 황새 냉이 말 냉이. 우리나라에만 스무 가지가 넘는 냉이가 들이 있다고 해요. 우리도 서로 많이 닮은 것 같지만 하나하나 살펴보면 저마다 다른 개성과 다른 이름들을 가지고 잇지요. 냉이의 꽃말은 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드립니다.” 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우리를 이어주는 것은 역시 그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이 아닐까 싶어요.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는데요. 그런 순수한 열정으로 이 봄을 더 아름답게 채워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330일 방송>

 

2. 오늘 본문은 성찬 제정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에 읽기에 알맞은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 이래로 성찬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논쟁 가운데 있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신학적인 논쟁은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교회 지도자는 성찬에 관해서 1년에 한번 정도는 특별한 교육을 시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찬에 관한 명칭에서부터 문제가 있는데 신학교에서는 5가지로 구별 지어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만찬/The Lord’s Supper)이라는 용어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알고 있었던 성만찬이란, 조금 독특했습니다. 물론 현대교회에서도 이를 계승하고 있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출석하는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식사를 준비해서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배드리기 전이나 예배를 드린 후에 식사를 하였는데, 이를 애찬이라고 불렀습니다(2:46, 고전 11:21, 고후 8:14). 그런데 문제는 예배에서 성찬식을 거행하게 되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애찬에서 마신 포도주와 성찬식에서 마시는 포도주에 대해서 분별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같은 포도주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를 분명하게 구별 짓기 위해서 주님의 만찬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애찬이 있을 때 둘 사이를 구별하는 용어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성체성사/eucharist라는 용어입니다. 이 용어의 근거는 마 26:27에 두었습니다. 지금도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이 용어를 사용합니다. 신학적으로는 논쟁 중에 있습니다.

    셋째는 성찬/Holy Communion이라는 용어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근원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에서 왔는데, 단순히 주님과의 친교만이 아니라, 모든 주님의 백성들이 성찬을 통하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는 공동체, 한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루터교회가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넷째는 최후의 만찬/Last Supper 란 용어입니다. 성례전적 의미가 없고, 단순히 예수의 만찬 사건을 가리킵니다. 역사적 차원의 성만찬을 의미할 때 자주 사용합니다. 대체로 low christendom에서 많이 사용합니다. 다섯째는 희생의 봉헌/Offering of Sacrifice이라는 용어입니다.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맞추는데, 이사야의 예언대로(53:6)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예시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 역시 low christendom에서 주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의 성찬을 생각하는 것은, 어느 것이 성경적 중심점에 더 가까운가를 살피고자 함입니다. 최근에는 최후의 만찬이나 희생의 봉헌이라는 용어를 제외하고는 무난하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개신교 입장에서는 성체성사를 동의하지 않는 게 분명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교단에서 가르치는 것을 따를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성찬이 의미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일까 하는 질문이나 관심은 가지는 것이 옳겠다 싶습니다. 제가 대학교 2학년 때 역사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자기 교파의 성찬이해를 발표하라고 해서 토론을 가졌던 아득한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 가장 가까운 성찬은 Holy Communion이라고 믿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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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50(2024. 3. 27. 성주간 수요일).

시편 시 55:1-3.

찬송 44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이 점점 불편해 집니다. 사고의 기준이나 사고의 전개 방식이 달라서, 나와 다른 의견을 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과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는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순간 내 주위에는 나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요.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보다 먼저 스스로가 편하기 위해서,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우선했던 때문이겠습니다. 조화는 비슷한 상대끼리 어울린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서로 다른 상대끼리 절충하며 어울리는 것, 그것이 조화라는 말이 지진 말이 아닐까 합니다.

    어느 순간 주위를 둘러보니, 엇비슷한 사람들과 늘 고만고만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합니다. 오랜 전엔 나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과 어울렸던 때도 있었는데요. 지금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집니다. 서로의 삶은 이미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만,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야기의 화제 역시도 별반 다르지 않지요.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그러한 마음은 사교의 범위와 깊이를 제한할 수 있습니다. 속마음을 털어놓고 흉금을 내 보이기보다는, 불편해 질 것을 먼저 염려하곤 하지요. 자극도 없고 성장도 없는 관계, 안주의 대가는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당연한 일일 겁니다. 그리고 그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비슷한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도 나름의 의미 있는 일이지요. 하지만 사람은 자극이 없으면 성장하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려봅니다. 자극은 낯설고 불편하게 사람을 변하게 만들지요. 서로의 말에 순응할 것이 아니라, 반론이 필요하다면 언쟁을 해도 좋을 겁니다. 불편할지라도 용기를 내서 말꼬리를 물고 늘어져도 나쁘지 않겠지요. 다름을 방치하거나 묻어두지 않고, 그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미 그 자체가 조화의 시작이 아닐까요?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9일 방송>

 

2.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시다(21-30)”을 읽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공관복음서에 비해서 유월절 만찬과 연관된 일화들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만찬 중에서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인 유다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신을 팔 자가 있다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누구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인지를 몰라서 서로를 바라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에게 눈짓을 해서 그 사람이 누군지를 여쭈어보게 하였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누굽니까?’하고 직설법으로 묻자, 예수님은 내가 빵을 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다.’고 하시며 가룟인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 모든 제자들의 궁금증이 풀린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가룟 유다가 어떻게 배신의 과정을 밟게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질문해야 하겠습니다. 가룟 유다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열 한 제자들 역시 주님을 배신하고 원수들에게 팔아버릴 계획을 가진 가룟 유다를 알게 되었으면서도, 어찌하여 이를 막아서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돌아볼 기회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악행을 멈추지 않고 진행했을까? 하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을 하면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에 눈을 뜰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인간은 잘못을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변명처럼 주절거리는 말, ‘그 때는 그게 그렇게 무서운 잘못인지를 모르고 그랬습니다.’는 소위 몰랐다는 변명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범죄자들의 행적에서는 거의 하나같이 한 사람도 모르고 죄를 지은 사람은 없었다.’라고 결론을 지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자신이 하는 짓이 얼마나 어리석고 심각한 잘못인줄을 잘 알면서도 그 죄의 길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변명하거나 용서를 구할 일말의 여유조차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에서의 심판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를 재판장 앞에 세우고 죄목을 열거할 때, 두 말도 할 수 없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죄의 수렁에 빠져들기 시작한 인간은 아무리 돌이켜보려고 해도 일단 출발한 이상 돌이키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마귀의 종이 된 후에는 뻔뻔스럽게 악마의 종노릇을 충실히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49(2024. 3. 26. 성주간 화요일).

시편 시 54:6-7.

찬송 41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계의 속담 사전을 찾아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행복이라는 말이랍니다. 역시 사람들의 최대 관심사는 행복이라는 얘기이겠지요. 그런데 흥미로는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많은 나라에서, 행복이란 돈 주고도 살수 없는 것이라는, 그런 의미의 속담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랍니다. 행복이라는 게 물질적인 부와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다는 얘기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곳곳에서 결국은 그 물질 때문에 부딪히고 싸우고 낙담하면서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니, 행복 못지않게 흔한 사랑이라는 단어만큼이나,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도 잘 사용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평화로운 주말 여러분 모두가 정말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328일 방송>

 

2. “야훼의 종의 둘째 노래(1-7)”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삶에서 많은 역설을 배우게 됩니다. 절망 깊은 골짜기에서 희망의 서광을 생각하고, 배고픔 그 끝도 없는 설움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눈뜨게 됩니다. 그래서 주름살이 깊은 어른들은 인생사 스무고개라는 말씀을 자주 하십니다. 그리고 새옹지마라는 말씀도 빼놓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길지 않은 삶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고개인줄 알고 이를 악물고 참고 견뎠는데, 그게 아니더라는 말입니다. 또 다른 고개가 그리고 또 다른 고개가 남아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또 좋은 날도 있을 거라며 새옹지마를 꺼내시며 용기를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난데없이 바닷가에 사는 주민들이며, 먼 곳에 사는 부족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당연히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이 상종도 하지 않는 낯선 사람에 불과한 소위 존재감도 없는 그런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런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이방인들의 하나님이시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잊혀진 사람처럼 한 번도 입에 떠올리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너무 낯설게 들릴까봐서 였고, 행여 오해할까봐서 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당한 때를 고르고 고르셨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귓전으로 스쳐듣지 않을 때, 적어도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때를 말입니다. 그것은 시련과 역경의 때였던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힘들고 괴로운 시간을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로 옆에 누가 사는지, 곁에 누가 울고 있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존재들인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눈치를 보고 계셨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리고 그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당신의 종으로 삼으시며 일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모든 이방도 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야곱과 그의 아들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름을 지으시고 말을 가르치시고, 손을 펴 그늘을 만들어 숨겨주시며, 잘 벼른 화살촉으로 만드셔서 화살 통에 꽂으시고 말씀하셨다고 말입니다. ‘너에게서 나의 영광이 빛나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연히 힘만 빼고 헛수고를 했구나.’ 고 탄식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알아봐 주시고, 내 품삯을 셈해 주시고, 귀히 여기시며, 힘이 되어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너를 만국의 빛으로 세우시고, 땅 끝까지 하나님의 구원이 이르게 하라.’고 당부하셨다고 말입니다. 이방인들에게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 소개하신 말씀이었습니다. 모처럼 이방인을 찾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택하여 세운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일러두신 것입니다. 왜였을까요? 하나님은 당신의 선택과 경륜에 대해서 끝까지 돌보고 계심을 알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민은 물론 너희 이방인들까지도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사랑에 있어서 다를 바 없다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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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48(2024. 3. 25. 성주간 월요일).

시편 시 54:4-5.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인 박 목월은 현대 한국 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1939년 등단해서 1978년 타계할 때까지, 목월은 많은 시와 산문을 남겼지요. 동시와 산문의 작가로써도 이름을 알렸습니다만, 역시 박 목월이라는 이름 앞에는 시인이라는 직함이 가장 잘 어울립니다. [청록집]에서부터 생전의 마지막 시집인 [모순], 사후에 출간된 [크고 부드러운 손]에 이르기까지, 박 목월이 시인의 이름으로 이루어낸 시적 경지는 참 크고 너른 것이었습니다.

    “달 안개 높이 오르고/ 청밀밭 밤 산기슭의 밤 비둘기/ 스스로 가슴에 고인 그리움을/ , 밤길을 간다/ 풀잎마다 이슬이 안고/ 눈 귓물이 우는 길을/ 달빛에 하나하나 꿈을 날리고/ 그 떠가나는 푸른 비둘기/ 눈물 어린 눈을 향긋한 달무리를/ 길은 제대로 숨어 버렸다

    박 목월의 대표작들이 담고 있는 계절은, 이 시의 계절처럼 이른 봄이 많이 있습니다. 방금 들으신 청밀 밭이 그렇고요 먼 산 선운사로 시작되는 <청노루>도 그렇습니다. 만물의 생명이 깨어나기 직전의 긴장감. 그 고요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목월의 시 안에는 늘 존재하지요. 작곡가 정 덕기는 이 곡을 대학 1학년 무렵에 작곡을 했습니다. 본래 시인이 되고 싶었던 작곡가는 시인으로써의 꿈을 간간히 목월의 시집을 뒤적이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봄 밤 푸른 밀밭에 담고 있는 고즈넉함이, 곡의 분위기를 통해 전해져 옵니다. 박 목월 시 정 덕기 곡 <청 밀밭>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8일 방송>

 

2. “땅의 성전과 하늘의 성전(11-14)”을 읽었습니다. 시골출신의 한 장로님이 성지순례를 갔는데, 대부분의 성지순례지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지은 것들로 감동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그런데 로마와 소아시아 지방을 둘러보고는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찾았는데, 비록 면죄부를 팔았다 하더라도 그 성당은 잘 지은 일 같다는 말을 해서 좌중을 놀라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땅의 성전이 저렇게 아름답거든 하늘의 성전은 어떨까하며 기대가 된다는 말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평생 초가집에서만 살던 촌로에게 5층짜리 반듯한 벽돌집은 평생 땅에서는 살아볼 꿈조차 꿀 수 없어서 하늘나라에서 그런 집에 살아보려는 희망을 가지는 때문인지, 계시록을 강의하는 목사님들은 5층짜리 하늘 집을 꿈꾸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가치에 함몰되어서, 영적이며 정신적인 가치를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때문에 생기는 오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천국 얘기가 하나 나오는데, 아브라함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16:19-31). 이 비유를 그림으로 그린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중의 한 그림에는 부자가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악사들이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며 불거진 배를 내밀고 있는 그림입니다. 그리고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를 개들과 함께 주어먹는 나사로가 땅 바닥에 엎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대해서 어떤 꿈을 꾸었을까요? 그는 단 한번 만이라도 배부르게 빵을 먹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 그릇을 마시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나사로 앞에 부자를 소환했습니다. 뜨거운 지옥의 불에 달아올라 몸과 마음을 축여줄 시원한 물 한 모금이 간절하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천국에 대한 희망을 제대로 가지자고 다짐했습니다. 모자라지 않을 만큼의 밥과 그 밥을 소화하기에 알맞은 반찬과 물 한 그릇이 있으면 족하다고 말입니다. 천국은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라, 평화와 기쁨 그리고 행복이 가득한 곳이면 더 할 나 위없이 아름다운 나라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유대인의 대속죄일과 예수님의 대제사장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히브리력 710(20241011/20241012/)에 대속죄일로 지키는데, 단 하루 동안에 대제사장이 지성소를 4번을 출입하면서 자신과 백성들을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 매우 중요한 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매년 이 번거로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린다는 말입니다. 이른바 제사의 효력이 1년 밖에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서 이 직무를 행하실 때까지는 계승되고 기억되어야 할 참 신앙의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크리스천들에게 있어서는 더 이상의 지성소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대속죄일이 필요 없게 되었다니 말입니다. 그것은 수송아지나 수 염소를 대신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제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한 예표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느끼는 일입니다. 오늘부터 시작되는 성 주간이 여러분 모두에게 깊은 참회와 기쁨의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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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47.

시편 시 54:1-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새는 날고 물고기는 헤엄치고, 인간은 달린다.” 에멜 자토펙이라는 체코 출신의 마라톤 영웅이 이런 말을 했답니다. 얼핏 들으면 너무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선, 달려야 한다는 것,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말인데요. 달리기 이야기를 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소설가 하루끼는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해 달리는 것이 아니다. 비록 짧게 살 수밖에 없더라도, 그 짧은 인생을 완전히 집중해서 살기 위해 달리는 것이다.” 중요한 것 달리기 자체가 아니라, 완전히 집중하는 삶, 바로 그것이겠지요. 오늘도 그런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9326일 방송>

 

2. 종려주일의 사도서간 빌 2:5-11을 본문으로 왜 그랬을까?”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고난 주일을 의미 있게 보내려는 분이라면 적어도 이 질문 왜 그랬을까?”를 진심으로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여 하늘 왕좌를 버리고 종의 자리에 오셨고, 어찌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을까? 어찌하여 최고의 영광을 예수께 주셨을까?

 

첫 질문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고 종의 자리인 인간 세상에 오셨을까? 입니다(5-7/ 3:16).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시련과 역경을 짊어지려 하지 않고 멋진 인생을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199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포브스 내시는 수상 소감에서, 조현병이란 정신병을 앓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한 아내 알리샤에 대한 얘기만을 하였습니다. 영광이란 꿈도 꿀 수 없고 대신 잘못되면 자신도 죽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한 한 여인이 자신의 전부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어찌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리를 내려놓고 가장 불행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셨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것은 넘치는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힘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며,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차디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질문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는 삶을 택하셨을까? 입니다(8).

우리는 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나 사건들을 만날 때, 큰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이른바 값진 삶이라며, 헛된 일처럼 보이는 일에 매달려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쓰레기 같은 일에 인생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깨우침입니다. 값진 삶을 사는 이들이란 묵묵하게 농사를 짓거나 유기견들을 돌보거나 매일 쑥이며 냉이를 팔러 장터에 나와 좌판을 깐 촌로들입니다. 그런가하면 쓰레기 같은 삶을 사는 이들이란 정치가나 권력자가 되어보려고 발악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사람이 에이브래함 링컨이었는데 하나님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자라고 말입니다. 후자가 쓰레기 같은 인물들인가는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 등장하는 인물로 묘사했습니다. 온갖 추악한 음모와 살인 모략 등으로 세상을 어지럽힌 사람들인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한 사람들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에게 최고의 영광을 주셨는가? 입니다(9-11).

어리석은 사람들이란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망각증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절대자를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권선징악>이라는 말이나, <사필귀정>이라는 말은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도덕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며,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장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매우 평범한 일에서 깨닫고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일터를 주셨고, 어울려 살도록 질서를 위해서 지도자들을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의 자리가 하나님의 자리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자신의 직무를 벗어난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주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 대상들은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될 게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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