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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15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자리는 무엇일까? / 고전 12:27-31. 2

묵상자료 8338(2024. 3. 15. 금요일).

시편 시 51:10-13.

찬송 26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곡에는 같은 제목을 가진 곡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제목만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같은 시에 여러 명의 작곡가가 곡을 붙인 경우도 있지요. 우리말이 지닌 운율의 매력을 잘 살린 글, 그리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담겨 있는 글은, 특히 가곡의 노랫말로 사랑 받았습니다. 김 영랑 이 은상과 더불어 김 소월의 글이 그랬습니다. 덕분에 소월의 대표작인 <초혼>이나 <산유화> <진달래 꽃>은 다양한 작곡가에 의해서 새로운 가곡으로 만들어졌지요. 시가 지닌 고유의 정서와 여러 작곡가의 다양한 음악 어법은 같은 글이지만 하나하나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낭송하는 것만으로도 음악처럼 느껴지는 소월의 시, 그 자체의 매력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웨이브 입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삼키는 슬픔을, 작곡가는 음악으로 잘 표현해 냈습니다. 작곡가 박 정량은 현재 삼육대학교에서 후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곡 <진달래 꽃>은 그가 음대에 재학 중이던 무렵에 만들어진 곡이지요. 19833회였던 대학 작곡 제에서 이 곡으로 작곡가는 본선에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소월의 시인 <초원> 역시도 가곡으로 만들었지요. 김 소월 시 박 정량 곡 <진달래 꽃>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6일 방송>

 

2.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 2(27-31)”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실패나 실연을 겪을 때,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다는 돌아보기 보다는 먼저 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을 조상 탓이란 말로 희화화하기도 합니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 대한 창 3장의 기록은 이를 대표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그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이 유추되었습니다. 첫째는 일시적인 모면 방법으로 핑계를 대고 싶었을 것이었고, 둘째는 같이 망하자는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계략이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지 못한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유의 남의 탓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오랜 옛날 얘기가 돼 버린 느낌이 드는 말,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말이 엄혹한 시절의 구호가 아니라, 지금 광명한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자유 경쟁의 시대에, 양성 평등한 시대에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60년대 초반에 서울 국회의사당(현 서울 시의회관)에서 한 임어당 선생의 연설을 읽었습니다. 그 요점은 농촌의 젊은이들아, 꿈을 가져라.”는 말씀입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였는데, 천민으로 태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야망을 품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의 이야기인데, 정작 자신의 아들은 공부도 일도 하지 않고 주색잡기에 소중한 젊은 날을 낭비하고 있었다 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삶과 아들들의 삶을 비교하며 타일렀는데, 돌아온 대답은 아버지는 삶을 바꾸려는 꿈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꿈이 필요하지 않았다 했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만을 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사도의 애정이 담긴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직분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직분을 예로 들었는데, 첫째는 사도, 둘째는 설교자, 셋째는 교사, 넷째는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 다섯째는 신유 은사자, 여섯째는 봉사자, 일곱째는 지도하는 사람, 여덟째는 방언하는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직분에 등급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되고 싶다거나 설교자나 교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최근에 저의 집 옆집으로 이사해온 가족이 있었는데, 그 집 안 주인이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교 출신이며 교파가 어느 곳이냐고 묻게 되었는데, 전혀 생소한 곳이었고 단기 과정을 나와서 지금도 배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에 예언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과 그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신학생들이 자주 했던 질문 중엔, 자신이 받은 은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공부하는 동안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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