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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18 교만병에 걸리기 쉬운 사람들. / 고전 14:1-19. 3

묵상자료 8341(2024. 3. 18. 월요일).

시편 시 52:1-3.

찬송 34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가올 주말에는 내달에 있을 한식/寒食을 앞두고 미리 성묘를 다녀오는 분들의 행렬이 서서히 시작되겠지요. 명절이나 절기마다 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움직이게 하는 것을 한 외신기자는 한국만이 지닌 핏줄의 힘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비단 우리 국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나고 자란 곳의 풀 한포기 흙 한줌에까지 애정을 보일 수밖에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고향에 대한 마음은, 다른 어느 날라 사람의 그것보다도 강하고 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몇 해 만인가 그리던 내 고향/ 뒤뜰에는 어머니 숨결 곳곳에 서려있는데/ 어릴 때 친구들 보이지 않고/대 숲에 무심한 바람만 부네/ 몇 해 만인가 그리던 내 고향/ 돌 틈엔 차가운 맑은 샘물 솟아오르고/ 그윽한 밤 꽃 향기 예전 같건만/ 수줍던 그 얼굴 찾을 길 없네

    풍부한 서정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설이나 명절 즈음에 들으면 더 아련하고 깊은 감상에 젖게 되는 작품이지요. 노랫말을 쓴 이 한숙 시인은 어릴 때 떠났던 고향을 오랜만에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위틈에서 솟는 물 댓잎을 스치는 바람, 장성해서 다시 찾은 고향의 모든 것은 옛 인연을 되찾은 것처럼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시인은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담아낸 싯구절에, 작곡가는 곡을 붙였습니다. 비슷한 색감의 옷들이 세련미를 더하는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노랫말과 멜로디가 만들어낸 조화가 돋보이는 곡이지요. 이 한숙 시 이 한삼곡 <고향에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8일 방송>

 

2. “이상한 언어와 예언(1-19)”을 읽었습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방언(이상한 언어)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최초의 방언을 찾아보면 어느 해 오순절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이 숨어 지내던 다락방에서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방언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의 방언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기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통의 언어였다고 했습니다(2:1-13).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는 수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아무 불편 없이 자신들의 말로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언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설명을 달고 있습니다(2).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상한 언어 곧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는 점입니다(3-5절에 4차례).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반해서, 방언은 자기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다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방언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익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피리나 거문고처럼 그 소리를 분별하지 못할 수 있고, 셋째는 알아듣기 쉬운 말을 두고 허공에 떠다니는 소리로 들린다면 뜻 없는 소리에 불과하며, 넷째는 방언으로 말할 때는 통역을 두어야 할 것이며, 다섯째는 깨달은 다섯 마디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매우 시끄러운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저마다 방언기도를 하고, 방언 설교도 하는 등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들의 홍수가 터진 것입니다. 가끔 유튜브에도 무슨 은사집회라며 영상이 올라오는데, 방언 기도를 하는가 하면, 방언 춤을 추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무질서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한다면 조용히 혼자 있을 때 하면 덕이 될 것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누구를 위해서 방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방언이 권장되기도 했으나, 그 폐해가 생기자 사도는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합니다. 차제에 요즘 건전하다는 교회 목사들 가운데서도 TV 방송설교 중에 방언을 말하거나 방언 기도를 하는 사례들이 있는데, 그 분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청년시절까지만 해도 김천 용문산 기도원이나 가평 한얼산 기도원을 자주 찾는 교우들이 하는 방언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금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었습니다. 교만병은 대체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병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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