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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3.07 훗날 우리가 받을 상급이란 어떤 것일까? / 고전 9:1-15.

묵상자료 8330(2024. 3. 7. 목요일).

시편 시 50:9-11.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작품의 위대함을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예술이란 이름 앞에 하나로 묶어줄 때가 그런데요. 예술작품 이 주는 공감과 감동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짧은 순간이나마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짧은 기억으로 서로에게서 희망과 가능성을 읽어내지요. 비록 살아온 시간은 다릅니다만, 그 마음 안에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 들어있다는 걸 말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 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곳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한 때 이 곡은 애국가보다도 더 많이 부른다는 통계를 얻기도 했습니다. 흔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정말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이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부르는 곡이 <고향의 봄>이 아닐까요? 아동 문학가였던 이 원수가 14의 나이에 지은 시였습니다. 작곡가 홍 난파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가 바로 이 작품이지요. 글을 쓴 이 원수는 당시 마산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산에서 우연히 방 정환을 만나, 그 인연으로 잡지 [어린이]에 원고를 보내면서 이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요. 이 원수의 고향은 본래 양산입니다. 하지만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창원으로 이사를 갔고, 결국 글쓴이가 그렸던 <고향의 봄>은 자란 곳인 창원의 봄을 말하는 내용이었지요. 고향의 개울이나 꽃 수양버들, 지금은 누구에게나 더욱 그리운 존재가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원수시 홍 난파 곡 <고향의 봄>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6일 방송>

 

2. “사도의 권리와 의무(1-15)”을 읽었습니다. 70년대의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를 구독할 때 어떤 분이 권 정생 선생의 일화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생전에 3차례 아동문학상을 받으셨는데, 한번은 아동 문학가들이 모임을 갖는데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안동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모임시간보다 일찍 장소에 도착하셨더랍니다. 그런데 안동 일직의 작은 교회당 종지기로 일하던 터라 행색이 변변치 못했는지, 건물 경비원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더랍니다. 그래서 아동문학가 모임에 참석하러 왔으니 들어가게 해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막아서서 경비실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차려입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몇 사람이 서둘러 내려와서 이름을 묻더랍니다. 그렇게 해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권 정생 선생님은 주변머리도 없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흙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옷을 걸친 사람이라면 어디에서건 주변의 시선을 다 끌어 모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겉모습에 머물 뿐, 한 치도 더 깊게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을 평생 괴롭혔던 문제 당신이 과연 예수의 사도인가?”였는데, 사도 스스로 이 문제에 불길을 지핀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퍼붓듯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인가?”, “내가 주 예수를 뵙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여러분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여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여러분에게 사도이며, 이를 증명할 확실한 표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느닷없이 사도의 권리를 꺼내들었는데, 주님의 형제들과 베드로 그리고 바나바를 끌어들여 자신과 비교합니다. 가정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비교하고, 일정/一定의 생활비를 받지 않는 자신을 비교한 것입니다. 자기 비용을 써가면서 군인 노릇하는 사람이나, 아무 대가없이 포도밭을 일구는 노동자나 양치기를 소환해서 그런 사람들이 있을 턱이 없는데도 엉뚱하게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은 정당한 품삯을 치르거나 적절한 사례를 한 경우가 아니면, 질이 떨어지거나 능력이 부족한 경우로 생각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통념을 따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9절 이하에서 사도는 모세의 율법을 소환해서, “타작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25:4)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은 소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농부인 우리들을 걱정하신 말씀이라고 해설을 붙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사도권에 대한 사도의 단호한 주장은, 자신의 권리를 물질적인 의미에서 되찾겠다는 뜻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존경과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훗날 우리가 받을 상급과도 같이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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