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38(2024. 3. 15. 금요일).

시편 시 51:10-13.

찬송 26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곡에는 같은 제목을 가진 곡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제목만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만, 같은 시에 여러 명의 작곡가가 곡을 붙인 경우도 있지요. 우리말이 지닌 운율의 매력을 잘 살린 글, 그리고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가 담겨 있는 글은, 특히 가곡의 노랫말로 사랑 받았습니다. 김 영랑 이 은상과 더불어 김 소월의 글이 그랬습니다. 덕분에 소월의 대표작인 <초혼>이나 <산유화> <진달래 꽃>은 다양한 작곡가에 의해서 새로운 가곡으로 만들어졌지요. 시가 지닌 고유의 정서와 여러 작곡가의 다양한 음악 어법은 같은 글이지만 하나하나 다른 느낌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낭송하는 것만으로도 음악처럼 느껴지는 소월의 시, 그 자체의 매력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 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웨이브 입이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곡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으로 삼키는 슬픔을, 작곡가는 음악으로 잘 표현해 냈습니다. 작곡가 박 정량은 현재 삼육대학교에서 후학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곡 <진달래 꽃>은 그가 음대에 재학 중이던 무렵에 만들어진 곡이지요. 19833회였던 대학 작곡 제에서 이 곡으로 작곡가는 본선에 오르기도 했었습니다. 또한 소월의 시인 <초원> 역시도 가곡으로 만들었지요. 김 소월 시 박 정량 곡 <진달래 꽃>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6일 방송>

 

2.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 2(27-31)”을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실패나 실연을 겪을 때, 자신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다는 돌아보기 보다는 먼저 남 탓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것을 조상 탓이란 말로 희화화하기도 합니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에 대한 창 3장의 기록은 이를 대표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 그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대답이 유추되었습니다. 첫째는 일시적인 모면 방법으로 핑계를 대고 싶었을 것이었고, 둘째는 같이 망하자는 수렁으로 끌어들이는 계략이었다는 것이며, 셋째는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믿음을 갖지 못한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유의 남의 탓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요즘은 오랜 옛날 얘기가 돼 버린 느낌이 드는 말, “자수하여 광명 찾자.”는 말이 엄혹한 시절의 구호가 아니라, 지금 광명한 시대에 꼭 필요한 말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자유 경쟁의 시대에, 양성 평등한 시대에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굴레를 벗어던지는 동기부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저는 60년대 초반에 서울 국회의사당(현 서울 시의회관)에서 한 임어당 선생의 연설을 읽었습니다. 그 요점은 농촌의 젊은이들아, 꿈을 가져라.”는 말씀입니다.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였는데, 천민으로 태어나 남의 집 머슴살이를 시작으로 야망을 품고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정승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의 이야기인데, 정작 자신의 아들은 공부도 일도 하지 않고 주색잡기에 소중한 젊은 날을 낭비하고 있었다 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을 불러놓고 자신의 삶과 아들들의 삶을 비교하며 타일렀는데, 돌아온 대답은 아버지는 삶을 바꾸려는 꿈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꿈이 필요하지 않았다 했더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여전히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만을 품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사도의 애정이 담긴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직분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직분을 예로 들었는데, 첫째는 사도, 둘째는 설교자, 셋째는 교사, 넷째는 기적을 행사하는 사람, 다섯째는 신유 은사자, 여섯째는 봉사자, 일곱째는 지도하는 사람, 여덟째는 방언하는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직분에 등급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음을 언급합니다. 그래서 사도가 되고 싶다거나 설교자나 교사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최근에 저의 집 옆집으로 이사해온 가족이 있었는데, 그 집 안 주인이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신학교 출신이며 교파가 어느 곳이냐고 묻게 되었는데, 전혀 생소한 곳이었고 단기 과정을 나와서 지금도 배우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 이미 오래 전에 예언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사도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모두가 다 기적을 행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교회 구성원의 다양성과 그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신학생들이 자주 했던 질문 중엔, 자신이 받은 은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공부하는 동안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7(2024. 3. 14. 목요일).

시편 시 51:7-9.

찬송 40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시를 좋아하지는 않겠지요. 누군가는 글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를 싫어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한가한 이들이나 하는 소일/消日이라고 비하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시를 좋아하십니다. 그것이 희열 때문은 아닐까 싶은데요. 말로는 형언하기 힘든 마음 속 어떤 감정 하나를 시를 읽는 것으로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의 희열 때문 말입니다. 요즘 같은 날 이 시를 자주 읽게 되는 것도 같은 이유지요.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에는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고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살아가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게 낮게 밀물져야 한다/ 사랑하는 이여 상처받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 추운 겨울 다 지나고 꽃필 차례가 바로 그대 앞에 있다

    칠레의 시인 파불로 네루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이 시를 정의하는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어떤 시들은 다른 말을 덧붙이기 힘들만큼, 시 한편으로 많은 말들을 생략하게 하지요. 김 종혜 시인의 시 역시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모두가 힘들다고 말하는 요즘 두 계절이 맞닿아 있는 것 같은 이 계절에 더 깊이 와 닿는 글이지요. 김 종혜 시인은 살아있는 시에 혼을 담아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시인의 몫이다 말하곤 했습니다. 그 말의 뜻을 시를 읽는 것으로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종혜시 이 한삼곡 <그대 앞에 봄이 있다>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4일 방송>

 

2.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12-26)”을 읽었습니다. 신앙인이건 아니건 간에 자신의 운명에 관한 궁금증이 항상 내재하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운명론/運命論과 결정론/決定論이 뒷받침을 하는데, 우선 이 개념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먼저 운명론이란 모든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들은 이미 하나님이나 다른 전능한 능력에 의해 예정되었으므로,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라는 신념으로, 종교적으로 이 견해는 예정설이라고 불립니다. 이 견해는 우리의 영혼이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결정되며, 우리의 선택과는 별개라고 믿습니다.”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결정론이 있는데, 결정론이란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우주 만물은 절대적으로 인과법에 의존하고, 지배된다는 견해입니다. 결정론자들은 인간의 행동을 포함한 모든 사건을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결정론은 보통 자유의지와 공존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운명론이나 결정론의 한 가지 공통점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자신의 미래를 바꾸거나 개선하는 데는 무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타고난 성별에 불만을 갖고 바꾸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트랜스전더가 그렇고, 성 염색체를 인위적으로 조합하는 것 등이 그렇습니다. 분명한 것은 앞으로 이런 작업은 계속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만은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것이며, 헛된 욕망임을 깨달을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라는 주제로,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이해를 기대하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로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하는 지체들을 흔히 백체/百體라고 불렀습니다. 백가지의 다양한 역할들을 맡아 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이 자신의 역할을 하찮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이 지체들에 대해서 경중/輕重을 따지는 일들이 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상처를 입거나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오면서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아무리 하찮은 지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고장이 나거나 제 구실을 하지 못할 때, 얼마나 많은 고통과 아픔이 있는지 모르겠더라는 말입니다. 가령 발가락 하나가 상처를 입거나 잇몸이 부어서 아플 때는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되던 경험 말입니다. 평소에는 주목받지 않는 지체일지라도, 일단 고장이 나거나 말썽이 생기면 온 몸이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연대성을 나타내곤 했던 기억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제 구실을 못하게 되는 일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몸을 이루는 지체는 그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비록 주목받지 못하는 우리의 역할이라 할지라도 매우 소중하고 값진 것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6(2024. 3. 13. 수요일).

시편 시 51:4-6.

찬송 371.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예술가라하면 보통 사람과는 좀 다른 그러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다,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술가들도 원하는 모든 재능을 가지지는 못했지요. 화가라고 해서 회화의 모든 분야를 아우르는 재능을 얻은 것도 아니고, 작가라고 해서 모든 문장에 너른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헌데 춘원 이광수의 문장은 당대를 호령할 만큼 뛰어난 것이었지요. 당시 매일 신보에 연재 되었던 소설 무정은 시대를 앞서간 문학작품으로 지금까지도 평가 받고 있을 정도입니다. 춘원은 욕심도 참 많았지요. 산문 뿐 아니라 시에 있어서도 뛰어난 작가이기를 그는 언제나 원했습니다.

    “옛 친구 대한 마음 아는 이나 올 것이/ 범연한 듯해도 대해 보면 정이 깊어/ 할 말도 없으면서도 날 가는 줄 몰라라/ 옛 친구 놓고 보면 생각도 끝없어라/ 어린 재 젊은 재 어느 덧에 다 보내고/ 오늘에 그대와 나와 중년이라 하나뇨

    이제는 백년 가까이 된 글입니다만, 지금 읽어도 손색없는 서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춘원 이광수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성격으로 전합니다. 덕분에 사회적인 계층이나 정치적인 성향을 막론하고, 그의 주변엔 벗들이 많았다고 하네요. 그래도 정치적인 성향은 가까운 사람들의 반목을 이끌어내곤 했었습니다. 오래 두고 사귀고 싶어 하던 벗들을, 그래서 춘원은 많이 놓아주어야 했지요. 한번 선택한 것은 뒤돌아보지 않는 거침없는 성격이었습니다만, 그 모습을 통해 춘원 역시도 많은 것을 깨달았겠지요.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중년에 덧없음을 담아낸 것입니다. 이광수 시 김동환 시 <옛 친구>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3일 방송>

 

2. “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1-11)”을 읽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여전히 논쟁 중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는 교파들이 있다는 것이 그 반증입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삼위일체 교리만큼 적절한 이론은 없으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 현명할 것입니다. 참고로 삼위일체 교리는 325년 니케야 공의회를 소집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확정되었는데, 여기에는 신학자 아타나시우스와 또 다른 신학자 아리우스와의 논쟁을 중재하기 위한 회의로 결국 313:5로 아타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이 채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격은 성부, 성자, 성령 세 가지(persona, προσωπον)이며, 서로 구별되면서도 본질은 같다(ὁμοούσιος)는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의 주문장인 성부 성자 성령이 성경에 등장하는 유일한 문장은 마태복음 28:19-20이 전부입니다. 물론 성경은 도처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독립적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이를 맥락적으로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삼위일체 교리 성립할 수 있다 하겠습니다. 곧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 성부성자성령이라고 말입니다. 신학이나 교리는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충분한 성경적 근거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께서 하시는 역할에 대한 내용입니다. 첫째는 예수를 저주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선물입니다(고전 12:3). 둘째는 주님을 섬기는 다양한 직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인데, 지혜의 말씀이나 지식의 말씀을 받기도하고, 어떤 이는 믿음을 또 다른 이는 병 고치는 능력 등입니다. 이는 성령께서 당신의 뜻대로 주시는 은사이기 때문에, 남의 은사를 부러워말고 잘 감당할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할까 고민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은사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내용이 12-31절의 말씀인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라는 표제어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눈과 다른 지체와의 관련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눈의 기능과 역할이 중요하지만 다른 지체들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가장 약한 지체가 더욱 요긴하다고 말입니다(22). 그러니까 우리들 생각으로는 가장 볼품없고 무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때에 따라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분은 몸의 지체 중 입이 가장 호강을 하는 것으로 알았는데, 지체들 사이에서의 대화를 들어보니 그게 아니더라는 얘기였습니다. 눈과 손과 발은 피곤한 일생을 살고 있었는데, 온전히 입을 위해서 일하고 있다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니까 입이 대답하기를 자신은 쉬지 않고 씹는 일을 하느라 잠도 편히 자지 못하고 중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씹은 것들을 온 몸으로 배달하고 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 대답한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5(2024. 3. 12. 화요일).

시편 시 51:1-3.

찬송 3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원로 작곡가 김 국진은 동세대 음악인 중에서 그리 잘 알려진 편은 아닙니다. 선생은 1930년 평남 강동에서 나고 자랐지요. 당시 음악을 배웠던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랬듯 김 국진 선생 역시도 신학교에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한국 전쟁이 나자 작곡가 김 국진은 바이올린 하나만 들고 월남해 부산에 정착하지요. 그리고 작곡에 전념했습니다. 교회 음악으로 공부를 시작했던 탓인지, 작품 중에는 종교적인 색채를 띤 곡들이 많았지요. 가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더불어서 말입니다.

    “꽃 그리워 하다가/ 고향 선운사 바람에 마음 속 건너/ 어머니의 봄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어머니의 꽃도 이제 피지 않는다/ 다시 핀다고 해도 꿈속에서나 아니면 비탈진 계절에 피는 상사화/ 어머니 선운산에 온통 꽃불이 났네요/ 오지 않는 어머니의 계절은 어디론가 가서 여승의 허물을 벗어주고/ 하늘 가 구름들이 새들을 따라가네/ 낯선 여행길에서 회귀하는 따뜻한 어머니의 꽃으로/ 흔들리는 게 삶이라고 알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려 늘 서둘렀네

    박 남권의 시에 김 국진이 작곡을 한 이 곡 <꽃 불>, 2007년 제8회 서울 창작합창제에서 선을 보였습니다. 우리 전통 리듬과 애상적인 노랫말의 조화가 인상적인 곡인데요. 곡이 지니고 있는 서정적이면서도 향토적인 느낌은 시대를 짐작할 수 없게 합니다. 작곡가 김 국진은 오랜 작품 활동 기간 동안, 교향곡 칸타타 우리 가곡에 이르기까지, 3천여 작품의 곡들을 완성했습니다. 그 가운데 발표가 되고 녹음된 가곡 작품은 30여 편에 이르고요. 가곡 작곡가로 알려진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보면,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는 수지요. 박 남권 시 김 국진 곡 <꽃 불>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1일 방송>

 

2.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2-16)”주님의 성찬(17-34)”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성경의 중심 주제나 맥락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성경의 배경에서 취급하였던 문제들을 구별해 내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오늘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하는 이유를 표제어로 삼은 본문도 그런 말씀 중 하나입니다. 에베소에서 활동하던 바울 사도에게 고린도 교회에서 불거진 문제 중 하나는 예배에 참석하러온 여자 성도들이 머리에 두건을 쓰지 않고 오는 것에 대해서 갑론을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가불 사도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1세기 아랍 문화권에서는 충분히 이해가 되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고린도를 방문했을 때는 19837월 말 경이었습니다. 현재의 고린도 시는 완전히 폐허가 된 곳입니다만, 화려했던 옛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안내인이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여러 신전들을 주목하게 하였는데, 놀랍게도 그곳에는 헬라의 다양한 신들을 섬기는 신전들이 몰려 있었습니다. 그곳은 우상의 도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신전을 유지하고 번창하기 위해서 많은 창녀들을 고용하기도 했다 했습니다. 당연히 제우스, 헤라, 포세이돈, 데메테르, 아테나,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레스, 아프로디테, 헤르메스, 헤파이스토스, 디오니소스 등 12신은 물론 로마의 신들, 그리고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용병들의 나라에서 섬기던 신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경쟁이 일어났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유혹해야 했던 것입니다.

    우상의 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특별히 여성들이 예배하러 모이는 것조차 힘들게 되었습니다. 우상의 신전들에 고용되어 있던 거리의 여자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표시로 머리에 수건들 쓰는 전통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서는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야 했기에, 여러 가지 얘기들이 성경적 견해를 덧 입혀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근본적으로는 1세기 헬라 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사도의 권위 있는 지도가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1950년대 혹은 1960년대의 기독교회는 공 맹자의 윤리적인 해석이 설교에서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회를 저급한 연애당 취급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일신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대안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도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시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자신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는 시대적 배경을 소개하는 내용도 있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하겠습니다. 이렇듯 성경의 배경이 본문처럼 등장하는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4(2024. 3. 11. 월요일).

시편 시 50:22-23.

찬송 4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봄이라는 말 뒤에는 유독 처녀나 아가씨라는 말이 잘 어울립니다. 봄이 지닌 화사하고 생기 넘치는 분위기가 흡사 젊은 여인들의 미소와도 비슷하지요. 고대 그리스의 여신 플로라에서부터 자잘한 흰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쓴 북 유럽의 소녀 그림이나, 또 아름다운 물방울 간의 아가씨 같이 모두가 다 봄입니다. 수천 년 동안 지구의 어느 곳이라 할 것 없이 겨울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은 소녀들을 아직은 바람이 싸한 들판으로 내 보내 봤습니다. 봄을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요. 무엇이 즐거운지, 봄 들판의 아가씨들은 콧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3천 년 전 유행가를 모은 [시경]에도 봄나물을 캐는 소녀들이 잦은 소재가 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겠지요.

    “푸른 잔디 풀 위로 봄바람은 불고/ 아지랭이 잔잔히 끼인 어떤 날/ 나물 캐는 처녀는 언덕으로 다니며/ 고운 나물 찾나니 어여쁘다 그 손목/ 소 먹이던 목동이 손목 잡았네/ 새빨개진 얼굴로 뿌리치고 가나니/ 그의 굳은 마음 변함없다네 어여쁘다 그 처녀

    산뜻하고 유창한 선율 진행에, 듣는 이도 더불어 유쾌해 지는 곡이지요. 1931년에 발간된 현 제명 작곡집 제2집에 수록된 후, 꾸준히 사랑받고 대표작입니다. 현 제명은 대표곡인 <그 집 앞>을 자신의 노래로 대중 앞에서 초연할 정도로 성악가로써 역시 남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5년 동안 음악 공부를 하고 돌아와서 연희전문 영어 교수로 부임한 그는, 귀국 초기 음악 독창회를 갖거나 가곡 등을 취입하는 등 주로 성악활동에 전념했습니다만, 곧 작곡에 몰입하게 되지요. 부르기 쉽고 이탈리아 민요를 연상케 하는 가볍고 경쾌한 곡의 분위기는 테너였던 자신의 목소리에 맞추어 작곡된 때문이라고 전하기도 합니다. 현 제명 작사 작곡 <나물 캐는 처녀>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0일 방송>

 

2.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23-11:1)”을 읽었습니다. 여러 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5명이 한 방을 사용하였는데, 20, 30분 간격으로 무슨 검사다 하면서 5명의 병상을 찾아다니며 불을 켜고 치료를 하게 되면 깊은 잠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환자와 병간하는 가족 간의 말다툼도 자주 있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회 공동체 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이런 현상은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부 신앙지식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사소한 실수라고 생각한 일들이었는데, 사실 깊이 생각해 보면 작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 중의 대부분은 아디아포라에 해당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가령 방학 때가 되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던 형들이 내려오는데, 대부분 주변의 산들을 찾아다니곤 하였는데, 그 형들이 메고 다니는 배낭 속에는 담배랑 소주병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모두 고향교회 장로님과 권사님들의 자재분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말로는 먹고 마시는 것이 구원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고향에 남아서 농사를 짓는 형님의 친구는 몇 차례 담배를 피웠다고 해서 6개월 수찬금지 책벌/責罰을 받고 있는 그런 처지인데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술렁거리기까지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아디아포로의 문제에 대해서 보다 분명한 가르침을 주어야 하겠다 생각한 글이 오늘 본문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중심 주제를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주초 문제나 제사 음식을 대하는 자세나 주일 성수나 십일조 등에 대해서 자기 견해가 분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흔들리기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때문입니다. 가령 구원에 관한 성경의 말씀은 시제/時制에 주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유독 과거나 현재의 시제를 강조한 나머지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에 관해서 3가지 시제를 다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았다(2:8). 구원을 받는다(10:13). 구원을 받을 것이다(2:12)와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대신해서 심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각 사람의 심령을 파악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이해하시고 가장 적절하게 판단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3(2024. 3. 10. 사순절 넷째 주일).

시편 시 50:19-21.

찬송 51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정호승 시인의 시집 제목인데요. 재미삼아 여러 가지로 슬쩍 변용해 볼 수도 있겠지요? 후회하니까 사람이다. 실수하니까 사람이다. 흔들리니까 사람이다. 이렇게도 얘기해 볼 수 있겠지요. 오후의 피곤이 조금 더 빨리 느껴지는 월요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지. 이렇게 좀 더 관대하게 말해 주는 마음의 영양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939일 방송>

 

2. 사순절 넷째 주일의 복음서 요 3:14-21을 본문으로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력은 우리 주님의 생애를 살피는데 가장 바람직한 안내서라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고난 한 복판을 살아가면서도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오히려 더욱 더 기피하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의미가 있습니다.

 

놋뱀 사건은 십자가 사건의 예표이면서 신앙의 신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14-15, 21:4-9).

광야 생활 40년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신앙을 배우는 다시 없는 기회였지만, 깨달은 자는 극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소위 체험 신앙의 약점이 고스란히 밝혀진 셈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이란 긴 세월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기적 속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매일 이른 새벽에는 만나를 내려주셨고, 석양에는 메추라기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메마른 광야에서 맑은 샘물을 마실 수 있게 하셨으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사막의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의 입에서는 원망과 불평이 멈추질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불뱀사건이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들을 불뱀에 물려죽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기도로 불뱀에 물린자는 높은 장대 끝에 매단 놋뱀을 바라보게 하셨고, 바라보는 사람을 죽음에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놋뱀을 바라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와 죽음에서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앙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진심/眞心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에 달려있습니다(16-18).

한국교회는 알미니안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적인 타락을 시인/是認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양 유혹합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갈 수 있다 확신합니까?” 하고 인간의 확신 여부에 구원이 달린 듯 가르칩니다. 그러나 인간의 확신이란, 바람에 나부끼는 초개(지푸라기)보다 믿을 게 못됩니다. 그렇게 확신을 힘주어 말하던 베드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되었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을 가르쳐야 할 루터교회와 장로교회가 제 구실을 못하는 때문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 매순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향해서 최선을 다하려 힘써야 구원받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빛과 소금으로 세상을 사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는 구원받은 모든 크리스천이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어야 합니다(19-21).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는 십자가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무리 교회당이 크고 봉사 활동이 활발하다 하더라도, 십자가를 찾을 수 없다면 기독교의 아류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역교회 목회자들이 생활고를 겪고, 예배당이 비가 새고 이런저런 고초를 겪는다고 해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십자가를 기대하고 출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준 사람들은 자신의 전 생명을 주님께 맡기고 살았던 헌신자들이 시대마다 우뚝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고후 5:17).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뿐 아니라, 순간 순간의 삶의 갈림길에서 향방을 선택하게 될 때는(고전 9:26), 반드시 기준이 되고 원칙이 되도록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2(2024. 3. 9. 토요일).

시편 시 50:16-18.

찬송 36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경험만큼의 글을 쓸 수밖에는 없다.” 누군가 말하더군요. 그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송 문원 시인은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시나 가곡을 위한 글로 완성했습니다. 투명한 색감의 수채화를 보고 있는 듯, 시인의 시에선 순수하고 소박한 서정이 느껴집니다. 누구나 한번쯤 겪어 봤을 법한 추억의 한 자락이 그의 글에선 느껴지지요. 그의 글을 담아낸 가곡에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이유 역시도,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꽃 등불 피어오르는 충무로에서/ 바람과 함께 별 빛으로 오시려나/ 옷깃을 파고드는 웃음소리 너울거리며/ 명동 거리에서 꽃물결 타고 오시려나/ 그대여 언제나 내 맘에 머무는 그대여/ 먼 곳에 있어도 내 가슴에 머무는 그대/ 목련꽃 치맛자락 즈려밟고 오시려나/ 허공을 서성대는 발자국 소리/ 그 거리에서 그렇게 오시려나/ 그대여 언제나 내 맘 속에 머무는 그대여

    이 곡의 바탕이 된 시는, 시인이 지난 해 발표한 시집 [바람의 칸타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또 어디에도 갈 수 있는 바람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바라보는 세상을, 시인은 마치 스스로가 바람이 된 듯 시를 통해 그려냈습니다. 시인 송 문원의 글은 서정적이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순순한 자유가 느껴지지요. 글이 지닌 그 느낌을 작곡가는 그 서정 그대로 여린 감수성의 곡으로 담아냈습니다. 가곡 이외에도 다양한 음악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 박희재의 재능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고요. 송 문원시 박 희재 곡 <>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9일 방송>

 

2.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1-13)”을 읽었습니다. 성경을 포함해서 모든 독서는 이해나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일반적으로 책읽기에는 일정한 가이드라인이 있습니다. 가령 책을 구입하려고 서점에 들러서 우선 책의 제목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저자의 서문을 읽고, 다음으로는 책의 목차를 훑어봅니다. 그런 다음에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간단한 프로필을 살핍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 하는지를 알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독서에 대한 고전 <How to read a book?>에서 M. J. Adler는 효과적인 독서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정보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읽는 신문이나 정보지, 흥미를 목적으로 하는 시나 소설, 의미나 진리를 목적으로 하는 교과서나 경전 등에 따라 구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성경이 다양한 주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제공하려는 근본 목적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20:31)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중심 주제를 염두에 두고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우리 한국교회 설교자들이 간과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인데, 우상 숭배란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안내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계명에 관한 최초의 말씀인 출 20:1-6의 내용에 제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신(다른 민족이 섬기는 신을 포함)을 섬기지 못하는데, 그 형상을 새기거나 만들어 섬기지 못하고, 그 앞에 절하지 못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말씀에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매우 소극적인 이해이며 해석이라는 말입니다. 우상 숭배는 절간이나 산속이나 논 한 가운데 나무나 돌 그리고 흙으로 빚어놓은 신상에게 절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로 우상숭배의 의미를 찾아내야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대신하는 모든 것들에게 전폭적인 신뢰와 의지하는 삶이라면 전부 다 우상숭배가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을 황금은 신으로 섬기고 있고, 어떤 사람은 권력을 신으로 섬기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 부모나 자식을 신처럼 떠받들고 있다면 적어도 그 사람에게는 그런 것들이 우상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다른 어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최고의 가치로 삼도록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31(2024. 3. 8. 금요일).

시편 시 50:12-15.

찬송 372.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의 노력이 세상을 바꾸는 일, 그리 쉽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의 노력은 주변을 작게나마 변화시키고, 그 작은 변화는 더 큰 반향으로 이어지기도 하지요. 작곡가 임 원식의 노력이 그랬습니다. 임 원식은 작곡가이기 이전에 지휘자로 더 잘 알려져 있지요. 국내 지휘계 1세대로 해외 유학이 흔하지 않던 시절에, 미국 쥴리어드 음대에서 지휘와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현 제명 계 정식 등과 함께 해방 후 최초의 교향악단인 <고려 교향악단>을 창단하기도 했지요. 지난 2002년 타계하기까지 우리 음악사에 임 원식이 미친 영향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찰 만큼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풀밭에 외로이 선 돌부처 옆에/ 반나마 묻힌 얼레빗 하나/ 임자 없는 얼레빗 하나/ 세월은 흘러가도 빗은 예대로 꼽혀 있네/ 돌부처 두고서 맹세하던 그 애 애닲아라/ 지금은 뉘 집 각시 되었노

    작곡가 임 원식의 가곡으로는 <아무도 모르라고> 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임 원식이 스물 셋 청년이었던 1942년 일본 도쿄 고등 음악학교 유학시절에 지은 곡이지요. 일제 치하였던 탓에 우리나라 시인의 시가 무척 구하기가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때 임 원식은 파인 김동환의 시 몇 편을 발견하지요. 그 작품들 가운데 <아무도 모르라게><얼레빗>이 있었습니다. 참 빗과는 다르게 빗살이 굵고 성긴 반원형의 큰 빗을 얼레빗이라 부릅니다. 지금은 본래 형태 그대로를 유지하는 얼레빗을 보기가 참 쉽지 않지요? 견결하면서도 서정성이 돋보이는 파인 김 동환의 시와 잘 어울리는 곡입니다. 김 동환 시 임 원식 곡 <얼레빗>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7일 방송>

 

2. “사도의 권리와 의무 2(16-27)”을 읽었습니다. 요즘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지를 새삼스럽게 느끼고 있습니다. 서재로 사용하는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누렇게 말라있는 잔디밭이 사랑스럽고, 한 눈에 들어오는 감나무 모과나무 목련나무 단풍나무도 정겹기만 합니다. 십 수 년을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그걸 바라보는 제 마음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깨우쳤습니다.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운 것은 마음이 시키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어쩌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복음 증거자의 자의식 또는 정체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하였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교계 뉴스는 무너져 내리고 있는 우리 교회의 모습을 비관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목회자들의 이중직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때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합니다. 제가 목회자를 결심했을 때는 많은 고향교우들과 친지들이 헐벗고 굶주릴까를 걱정하였습니다. 제게 청혼을 하려던 여자 친구는 슬픈 눈으로 저를 쳐다만 보았습니다. 그런데 70년대 빌리그래함 전도 집회를 전후해서 한국 교회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습니다. 전국복음화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고, 목사 지망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마치 성공의 지름길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진정성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유행이었고, 인간 세상의 풍조였던 것입니다. 복음증거자의 자의식이나 정체성에서 보다 진지한 자기 검증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복음 증거자의 자의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전도자의 일은 마땅히 해야 할 일로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화가 미칠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자신이 자발적으로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무로 보수를 기대할 수 없다 합니다. 다음으로 복음 증거자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 증거자로 살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유인의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율법을 강조하고, 이방인에게는 율법보다는 도덕을 강조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한 사람처럼 비굴해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셋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에게 복음이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일한다면, 복음 전도자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면류관이 아니라, 불멸의 면류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이런 자의식과 정체성을 가진 일꾼을 한 사람만이라도 육성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제 힘과 지혜로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할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