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46(2024. 3. 23. 토요일).

시편 시 53:4-6.

찬송 44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마음 씀씀이는 애써 감추려고 해도, 뜻하지 않은 곳에서 불쑥불쑥 들어나곤 합니다. 음악 하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곡을 표현해 내는 성악가의 목소리나, 작곡가들이 만들어 내는 음의 배열, 그리고 시인이 선택하는 단어들을 통해서,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그들의 마음을 짐작하게 됩니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이렇게 고운 곡을 쓰는 사람은 분명 착한 사람일거야. 물론 그 짐작이 다 사실과 같지만은 않겠지만 말입니다. 작곡가 신귀복의 곡은 <얼굴> 같은 대표곡이 그렇듯 참 온화하고 유합니다. 크게 욕심을 내지 않고 기본이 되는 것들을 간과하는 법이 없지요. 가장 알맞은 상태로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 음악 어법, 그의 음악을 듣다보면 작곡가는 그의 음악과도 같은 그런 성품을 지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게도 됩니다.

    “우아한 모습 향기롭고 아름다운 내 연인이여/ 아침햇살 은은한 뜰 악에서 그댈 느끼네/ 가슴 가득한 그리움 애달픈 내 사랑/ 잔잔한 그 빛에 스며들고 싶어라/ 끝없는 사랑의 향기 차마 못 다한 애절한 노래/ 그 가슴에 기대어 심호흡하고 싶어라// 우아한 향기 친숙하고 향기로운 내 사랑이여/ 오랜 기다림 짧은 만남/ 뜰 악에서 그대를 느끼네/ 가슴 가득한 그리움 한줄기 환희/ 은은한 그 빛에 스며들고 싶어라/ 끝없이 펼치는 혼 차마 못 다한 사랑의 노래/ 그 가슴에 기대어 심호흡하고 싶어라

    산수유, 목련, 겹 벚꽃, 여의도 공원에도 봄꽃들의 수식이 한참입니다. 목련의 모습은 단아하다는 말 외에 어떤 수식어도 붙이기 힘들지요. 목련이 지니고 있는 정갈한 이미지를  시인과 작곡가는 담담하게 우리 가곡으로 완성을 했습니다. 왠지 학창시절이나 중고등학교의 교정, 단발머리 밑으로 흰 목이 들어난 앳된 여고생의 뒷모습이, 노래와 더불어 떠오르기도 하지요. 작곡가 신귀복의 곡들은 묘하게도 추억을 회상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작곡가 스스로도 그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 말했던 처럼 말입니다. 유 영애 시 신 귀복 곡 <목련>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5일 방송>

 

2. “믿음의 생활(16-18)”을 읽었습니다. 사고방식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게는 다양한 이웃들이 있습니다. 지연으로 맺어진 분들도 있고, 학연으로 맺어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신앙으로 맺어진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관계로 알게 되었든 간에 생각의 틀이 유연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 생각의 틀이 굳어버린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몇 마디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떤 유형의 생각을 하는지를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두 주 후에는 총선 투표일이 되는데, 그래서인지 마치 어느 후보의 선거운동원인 양 입에 거품을 물고 자신이 좋아하는 후보를 지지하는가 하면, 그 반대인 후보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런 분들이 있어서 정치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헬라 철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의 전형을 보는 듯 했습니다. “외적인 인간과 내적인 인간이라든가, “지금 잠시와 영원이라든가, “보이는 것은 잠시 뿐이지만 과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라든지 하는 내용이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은 일원론적 사고방식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라고 하지 않고, 사랑과 성숙하지 않은 사랑이라든가, 선과 악이 아니라, 선과 모자란 선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립적인 두 개가 아니라, 좋은 것과 조금 덜 좋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원론과 헬라식인 이원론은 엄청난 차이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원론은 아무리 노력해도 서로 조화는커녕 곁에도 다가설 수 없는 것이지만, 일원론은 조금만 배려하면 합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산다는 말이 아니라, 낡아지기 쉬운 인간이지만(외적으로 보면), 나날이 새로워질 수 있는 희망찬 내적인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잠시 동안은 가벼운 고난의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겠지만, 조금 후에는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들은 낙심하게 하고 슬퍼하게 할 것들이지만, 영의 눈으로 조금만 더 살피면 영원한 것들이 가슴에 스며들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은 낡음과 새로움은 정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조금 부족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잠시 잠깐은 고난과 아픔이 있지만, 그것들은 성숙한 삶으로 익어가는 생채기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온 세상이 잠든 죽음같이 캄캄한 새벽을 꼿꼿한 자세로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연신 비비며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은 잠시뿐인 젊음의 한 때를 영원에 잇대려는 일생일대의 도박심리가 남아 있어서라고 말입니다. 파스칼은 믿음은 인간이 도전할 단 하나의 도박이라고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45(2024. 3. 22. 금요일).

시편 시 53:1-3.

찬송 82(통일찬송).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문학사를 운운할 때, 김 소월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지요. 우리 가곡 역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가곡의 작곡가라면 소월의 시에 작곡한 곡이 하나 이상은 있다는 말이 과언은 아닐 만큼, 소월은 우리 음악가들에게 각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중 작곡가 하 대응의 경우엔 더욱 특별했지요. 1983년 타계한 작곡가 하 대응은 생전에 다작을 한 작곡가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 대응의 많지 않은 가곡 작품가운데 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 대부분이었지요. <초혼> <못 잊어> <가는 길> 그리고 <>까지 작곡가 하 대응은 소월의 시에 유독 애착을 보였습니다.

    “산새도 오리나무 위에서 운다/ 산새는 왜 우노/ 심해산골 영/넘어가려고 그래서 울지/ 눈은 내리네/ 와서 덮이네/ 오늘도 하룻길 칠팔십 리/ 돌아서는 육십 리는 가기도 했소/ 불귀 불귀 다시 불귀/ 산수 갑산을 다시 불귀/ 사나이 속이라 잊으련만/ 십오 년 정분을 못 잊겠네/ 산에는 오는 눈/ 들에는 녹는 눈/ 산새도 오리나무위에서 운다/ 산수 갑산 가는 길은 고개 길

    작곡가 하 대응은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본래 음악에 재능이 많았던 것으로 전하고요. 휘문 중학에 재학 중일 때에는 바이올린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휘문 고보를 졸업하고 작곡가는 바로 일본으로 도쿄로 유학을 떠납니다. 전공은 바이올린이었지요. 그렇지만 학기가 끝날 무렵 지도교수는 하 대응에게 성악에 대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결국 바이올린에서 성악으로 전공을 바꾸게 되지요. 유학중이던 당시 전 일본 음악 콩쿠르에서 성악부 2위를 차지할 만큼, 성악에 있어 하 대응의 뛰어난 것이었다 전합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유학을 앞두고 부모의 반대로 귀국을 하고, 이후 음악 교사로써의 생을 꾸려가지요. 성악 도로써 무대에 서지 못하는 대신 곡에 쏟은 음악적 열정이 느껴집니다. 김 소월 시 하 대응 곡 <>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4일 방송>

 

2. “질그릇에 담긴 보물(1-15)”을 읽었습니다.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는 기막힌 표현이 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이야기하는 불가/佛家에서는 인간 모욕죄목을 붙일지 모르겠다는 뜻이 전자/前者이고, 인간의 덧없음과 무력함에도 불구하고 삶의 대견스러움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는 후자/後者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에 인용한 질그릇은 인간을 후자에 비유한 것이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제 아침에는 한 대학 동기생에게서 10만원 벌금을 내더라도 손자자랑을 하겠다며 손자가 쓴 일기장을 훔쳐본 얘기를 전해 왔습니다. <쓰레기>라는 제목의 시 같았는데, “우리 반과 거리에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먼지 낀 쓰레기들/ 그냥 두면 얼마 안가 서로 합체해서 괴물이 될지 모른다/ 산책하는 내가 얼른 주워서 주머니에 둔다/ 합체 못한 쓰레기들이 쓰레기통에 시무룩해 하고 있다별의 별 잡동사니가 한 자리에 섞여 있는 쓰레기를 보고, 어린 마음에도 이것들이 괴물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하는 그 마음이 대견했습니다. 훗날 시인이 될 사람에게 수학은 도움이 안 될 거라며 낙제 점수만 면케 해 달라 했던, 그래서 마침내 시인이 된 고교 동창생이 생각났습니다. 지금 들어온 눈에는 별 것 아닌 듯해도, 한 마음으로 곧게 키우면 재목이 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부모님이나 주변 어른들이 도닥도닥 잘 격려하면 쓸모 있는 여문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보화를 담아주셨다 말합니다.

    한두 번 읽은 말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초등학교 3학년의 시와 사도의 편지를 읽으며 정신이 번뜩 났습니다. 이 늙고 병든 몸에도 보화가 담겨 있다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동안 그 보화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안달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사도는 그 보화를 찾아내려는 사람들에게 오래 기다리지 않게 답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 보화란 예수의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예수의생명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고 까닭을 알려준 것입니다. 겉으로는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지만, 결국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고 자신의 경험을 전하고 있습니다.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하였다.”(116:10)는 말씀을 소개하면서, 우리는 이와 똑 같은 믿음의 정신을 가지고 믿고, 또 말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분이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시고, 여러분과 함께 우리를 그 분 곁에 앉히시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44(2024. 3. 21. 목요일).

시편 시 52:8-9.

찬송 38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남녘에서 하나 둘 들리는 꽃 소식을 통해, 계절을 실감하게 됩니다. 머지않아 어느 곳을 둘러봐도, 온통 꽃인 그런 순간이 오겠지요. 싱그럽고 눈이 부시만큼 밝고 환한 아름다운 꽃에 둘러싸일수록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괜스레 걱정되기도 합니다. 아 뭐 자격지심일 겁니다. 꽃을 곁에 두고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부담스런 마음은, 이 계절에 대한 크나큰 모독이자 결례겠지요?

    “살아 있어 눈부시구나/ 땅에서 땅으로 다시 살아나/ 눈물겹도록 아름답구나/ 그대 얼굴 바라보면/ 수만만의 환희/ 다시 그리움으로 물결치는데/ 살아서 외롭던 사람/ 눈부신 기쁨으로 피어나라고/ 봄날은 온다네/ , 살아서 괴로운 사람/ 고통 근심 잊으라고/ 하늘 소식 전하네/ 깨어있어 눈부시구나/ 긴 어둠 이기고 다시 살아나/ 눈물겹도록 아름답구나/ 그대 모습 바라보면 하늘 가득 햇살/ 다시 무지개 되어 비쳐드는데/ 살아서 괴롭던 사람/ 이제는 환한 나라 향기로워라/ 새날은 온다네/ , 살아서 외로운 사람/ 새 생명 길 바라보라/ 하늘 편지 전하네.”

    볕이 무척 좋은 날 양지쪽에 잘 내어 말린 빨래처럼, 습기 없이 보송보송한 느낌을 주는 곡입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에 생기를 더해 주듯 밝은 곡의 분위기가 기분까지 경쾌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요. 노 유섭의 시 <봄 꽃>은 작곡가 박 희재와 김 대웅이 각각 작곡을 한 두 곡의 가곡이 존재합니다. 작곡가 박 희재가 곡을 붙인 이 곡 봄꽃은 무척 활기 넘치는 곡이지요. 주로 서정적이고 애상적인 곡들이 많아서인지, 이런 명랑한 가곡이 더 반가운 기분이 글이 담고 있는 봄의 희망, 그 메시지를 작곡가는 음악적으로 밝게 표현했습니다. 2007년에 열렸던 제 8회 서울 창작 합창제에서 특히나 주목 받았던 곡입니다. 노 유섭 시 박 희재 곡 <봄 꽃>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3일 방송>

 

2. “새 계약의 일꾼2(7-18)”을 읽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두 종류의 하나님의 일꾼을 등장시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하던 모세였습니다. 모세는 돌판에 새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칠 소명을 받은 일꾼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돌판에 새긴 율법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일이었습니다(34:29-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얼굴에서는 찬란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얼굴에서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너울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34:33, 35). 두 번째 일꾼은 성령께 소명을 받은 일꾼인데, 그는 사람들에게 죄와 죽음의 굴레 아래 살고 있을 때, 그들에게 무죄 석방하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모세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러운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두 종류의 하나님의 일꾼들이란 누구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문자로 전하는 첫 번째 일꾼들은 모세를 비롯한 구약의 율법사와 지도자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맡은 직무는 율법의 앞부분이었습니다. 매우 엄격하고 준엄한 법조문들이었습니다. 대체로 그 말미에는 반드시 해야 한다.” 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등의 무서운 말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와 같은 그들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치려고 한다면 충분한 시간을 갖고 그 이유와 중요성을 얘기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상처를 입지 않도록, 심지어는 죽지 않도록 막아서는 것부터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일꾼이 있었는데 그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복음을 맡은 자들은 이미 죄와 죽음의 수렁에 빠진 사람들에게 꾸짖고 충고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습니다. 먼저 그들을 살리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사랑과 위로의 말을 해 주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의 삶의 자리는 제 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거나,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불쌍한 사람이거나, 둘 중 하나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책망이 필요한 사람과 위로가 필요한 사람, 이 두 종류의 인간들만이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인생에서 그래도 여유 있었던 시간은 언제였던가 하고 말입니다. 가정교육을 받던 6년과 초등 중등 고등학교를 다니던 12, 합해서 18년의 시간들이었다고 말입니다. 물론 바쁜 시간도 있었습니다만, 그래도 고전을 읽고 가곡을 목청껏 부르고 교장선생님의 설교를 듣던 시간은 제 인생에서 다시없었던 여유 만만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넉넉했던 시간에 인생을 멀리 내다볼 수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 역시도 책망이 필요한 사람으로 살았던지, 아니면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만 살지 않았을까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람으로 살고 있는지요? 여전히 책망이 필요한 사람으로 진땀을 흘리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어느 쪽이든 위기의 때를 지나가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43(2024. 3. 20. 수요일).

시편 시 52:6-7.

찬송 25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양 명문 시인은 시인이기에 앞서, 변 운의 가곡 <명태>의 노랫말을 쓴 사람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 도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가지요. 그리고 1.4후퇴가 되어서 월남합니다. 시인은 월남 후에 전쟁 중 많은 문인들이 그랬듯, 육군에 종군 작가로 활동했습니다. 작곡가 김 동진과의 인연은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시기, 피난지였던 대구에서 시작됐는데요. 당시 대구 향촌동 골목 안에 르네상스라는 이름의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구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예술인들의 본거지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싸리문 부여잡고 기다리는가/ 기러긴 달밤을 줄지어 간다/ 모란 꽃 필적에 정다웁게 만날 님/ 흰 국화 시들듯 시들어도 안 오네/ 서산엔 달도 지고 홀로 안타까운데/ 가슴에 얽힌 정 풀어볼 길 없어라

    우리 민요 아리랑을 현대 음악의 언어로 가장 잘 읽어낸 곡이 아닐까 합니다. 가곡이면서 민요 같고 민요이면서 가곡 같은 그런 느낌을 주지요. 작곡가 김 동진 역시 양 명문 시인과 더불어 고향을 북에 두고 있습니다. 김 동진의 고향은 평남 안주입니다.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작곡가 김 동진과 시인 양 명문은 꽤 가까웠던 것으로 전합니다. 음악 감상실 르네상스의 단골로 누구나 김 동진과 양 명문을 꼽을 정도로 둘은 늘 그곳에 있었다고 하고요. 덕분에 양 명문이 글을 쓰고 김 동진이 작곡을 한 곡들은 그 시기에 모두 만들어졌습니다. 이곡 <신 아리랑>을 비롯해서 <섬 가에서> 또 피난민이라는 부제가 붙은 <7월의 노래>도 모두 그 시기의 작품들이지요. 양 명문 시 김 동진 곡 <신 아리랑>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1일 방송>

 

2. “그리스도의 향기(12-17)”새 계약의 일꾼(18-3:6)”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첫째 단락입니다. 우리의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냄새는 두 가지 종류로 풍겨납니다. 하나는 향기로운 냄새로, 다른 하나는 악취 나는 냄새로 말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한 친구가 지하철에서 겪은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여름이었고, 며칠 째 샤워를 하지 않고 집을 나섰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중년 여성이 몸을 움츠리면서 샤워 좀 하고 다니시지.”라고 중얼거리더랍니다. 그 다음 부터는 신경을 써서 자주 샤워를 하거나 그렇지 못할 땐 향수를 뿌리곤 했다 합니다. 향기로운 냄새를 풍길 수도 있고, 악취를 풍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말했습니다. 오늘 사도는 은유적인 표현으로 향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 속에서 누군가에게 향기로 기분을 좋게 해줄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취를 풍길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매우 놀라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향기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구세주를 바르게 알고 있을 때 풍기는 향기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이나 멸망 받을 사람에게 다 풍기게 될 것인데, 멸망 받을 사람에게는 역겨운 죽음의 악취가 될 것이지만,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는 의식적으로나 억지로 풍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향기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감미로운 생명의 향기가 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죽음의 악취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를 소유하게 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연히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향기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사도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축재/蓄財의 수단으로 팔아먹는 장사꾼이 되지 않은 것이라 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꾼으로써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하는 일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수한 마음이란 진실한 동기 혹은 순수한 동기라는 용어 에이리크리네이아/ειλικρινεια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출세나 치부의 수단으로 장삿속으로 팔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 사람들을 죄와 죽음에서 살려내시려는 마음으로 전해야 한다는 뜻이라 하겠습니다. 연일 목회지의 열악함을 전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목회를 성공과 출세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생명이라도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생명의 양식으로 전파하고 있는지를 돌아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42(2024. 3. 19. 화요일).

시편 시 52:4-5.

찬송 24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 김 연준은 사람들이 가곡을 부르는 한, 음악이 우리 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한, 노래들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습니다. 늘 자신의 음악적 위치를 새로 정의내리면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음악만이 삶의 기쁨을 준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지요. 그렇기에 오선지가 곁에 없으면 백지에 숫자로 약식 음표를 대신하면서도 떠오르는 음악적 영감을 기록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우울한 고뇌와 시상이 담겨 있는 곡 <시인의 죽음>은 슬픔도 작품 안에 녹여내려고 했던 작곡가 김 연준 음악 혼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달무리 진 어느 날 밤/ 별빛들도 스러지고/ 마지막 너의 입맞춤은 피 토하는 두견사랑/ 피멍 지는 내 울음은 이젠 아득하여/ 가슴에 와 울어라/ 가슴에 와 울어라/ 너는 바람 되어 영원으로 가 버리고/ 하늘의 메아리로 슬픈 노래만 남아라

    시인과 작곡가가 각각의 예술작품을 통해 담아내고자 했던 애절한 비애가, 마음에 고요하게 와 닿는 기분입니다. 곡 제목에 쓰인 주검이라는 단어는, 맞춤법상으로는 주검이라고 표기해야 맞습니다. 그렇지만 문학작품엔 문법을 떠나서 문학적인 허용이라는 것이 존재하지요. 작가가 쓴 글 그대로를 곧이 감상하는 것은 글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이 되고 바른 감상법이지 않을까 합니다. 작곡가 김 연준의 작품 가운데 <비가>와 더불어 차분하고 애성적인 선율로 사랑받고 있는 곡이지요. 작곡가는 지난 해 1월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간이 참 무상하게 느껴집니다. 김 양식 시 김 연준 곡 <시인의 주검>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0일 방송>

 

2. “이상한 언어와 예언 2(20-25)”교회 안에서의 질서(26-40)”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동 서양 문화의 큰 차이점 가운데 하나는 동양에서는 서열 문화가 있는데 특히 연장자를 높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질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할을 분담하는 것도 질서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고, 구체적인 순서나 내용에 대해서도 적절한 안내를 하는 것 역시 질서를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선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데, 저마다 자신의 역할만을 주장하거나 강조한다면, 구성원들 간에 불협화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만, 교회의 덕을 세우는 목표아래 일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이상한 언어(방언)를 말하려 한다면 두 세 사람이 차례대로 말하게 하며, 해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만일 해석할 사람이 없다면 교회 안에서는 방언을 쓰지 말고 혼자서 말하거나 하나님하고만 말하는 게 좋겠다고 제안합니다.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교회가 질서를 잃게 되면 평화가 깨질 것을 내다본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소아시아 지방에서 관습처럼 정착한 것이라며, 여자 성도가 교회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말씀 때문에 교회 안에서 여자 지도자들을 세우지 않고 남자 중심의 지도자들로 채우는 것은 1세기라는 시대적 배경을 무시하거나, 문자적 성경 해석의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정한 시대 배경을 불변의 말씀으로 승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개신교회들은 교회의 직분의 명칭을 두고도 문자적 고집을 부리는 것은 성서 해석학을 공부하지 않은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유연성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 역시 세상이라는 큰 틀안에 있는 구성원이라는 자기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위해서 존재하는 곳인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를 세상 아래에 두자는 말은 아닙니다. 교회가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선도적인 공동체로 세상을 감동 감화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기 한국 기독교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한국 사회에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우리 학교 교육보다 시청각 교육도 교회가 먼저 시작하였고, 어린이를 위한 동요나 레크리에이션도 교회가 앞서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교회가 배출한 인물들이었음은 자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재도 교회를 중심으로 연주회나 합창 대회 등이 꾸준히 진행되고 있는 것은 교회의 큰 자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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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41(2024. 3. 18. 월요일).

시편 시 52:1-3.

찬송 34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가올 주말에는 내달에 있을 한식/寒食을 앞두고 미리 성묘를 다녀오는 분들의 행렬이 서서히 시작되겠지요. 명절이나 절기마다 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움직이게 하는 것을 한 외신기자는 한국만이 지닌 핏줄의 힘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비단 우리 국민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나고 자란 곳의 풀 한포기 흙 한줌에까지 애정을 보일 수밖에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우리 고향에 대한 마음은, 다른 어느 날라 사람의 그것보다도 강하고 진한 무언가가 있습니다.

    “몇 해 만인가 그리던 내 고향/ 뒤뜰에는 어머니 숨결 곳곳에 서려있는데/ 어릴 때 친구들 보이지 않고/대 숲에 무심한 바람만 부네/ 몇 해 만인가 그리던 내 고향/ 돌 틈엔 차가운 맑은 샘물 솟아오르고/ 그윽한 밤 꽃 향기 예전 같건만/ 수줍던 그 얼굴 찾을 길 없네

    풍부한 서정이 느껴지는 곡입니다. 설이나 명절 즈음에 들으면 더 아련하고 깊은 감상에 젖게 되는 작품이지요. 노랫말을 쓴 이 한숙 시인은 어릴 때 떠났던 고향을 오랜만에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위틈에서 솟는 물 댓잎을 스치는 바람, 장성해서 다시 찾은 고향의 모든 것은 옛 인연을 되찾은 것처럼 새롭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시인은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담아낸 싯구절에, 작곡가는 곡을 붙였습니다. 비슷한 색감의 옷들이 세련미를 더하는 것처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노랫말과 멜로디가 만들어낸 조화가 돋보이는 곡이지요. 이 한숙 시 이 한삼곡 <고향에서>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8일 방송>

 

2. “이상한 언어와 예언(1-19)”을 읽었습니다. 초대교회 이래로 방언(이상한 언어)은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최초의 방언을 찾아보면 어느 해 오순절에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들이 숨어 지내던 다락방에서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방언을 말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의 방언은 다양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자기 말로 알아들을 수 있는 소통의 언어였다고 했습니다(2:1-13). 그래서 베드로의 설교는 수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아무 불편 없이 자신들의 말로 복음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고린도 교회에서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언어로 취급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상한 언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설명을 달고 있습니다(2).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상한 언어 곧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는 점입니다(3-5절에 4차례).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데 반해서, 방언은 자기 자신의 덕을 세우는 것이라고 하며, 그래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다고 권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방언의 폐해를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첫째는 유익이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피리나 거문고처럼 그 소리를 분별하지 못할 수 있고, 셋째는 알아듣기 쉬운 말을 두고 허공에 떠다니는 소리로 들린다면 뜻 없는 소리에 불과하며, 넷째는 방언으로 말할 때는 통역을 두어야 할 것이며, 다섯째는 깨달은 다섯 마디 말이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안에 매우 시끄러운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저마다 방언기도를 하고, 방언 설교도 하는 등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들의 홍수가 터진 것입니다. 가끔 유튜브에도 무슨 은사집회라며 영상이 올라오는데, 방언 기도를 하는가 하면, 방언 춤을 추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무질서하기 짝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한다면 조용히 혼자 있을 때 하면 덕이 될 것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누구를 위해서 방언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방언이 권장되기도 했으나, 그 폐해가 생기자 사도는 그 문제점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생각합니다. 차제에 요즘 건전하다는 교회 목사들 가운데서도 TV 방송설교 중에 방언을 말하거나 방언 기도를 하는 사례들이 있는데, 그 분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청년시절까지만 해도 김천 용문산 기도원이나 가평 한얼산 기도원을 자주 찾는 교우들이 하는 방언을 교회가 적극적으로 금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교만해지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었습니다. 교만병은 대체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병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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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40.

시편 시 51:17-19.

찬송 13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지/奧地의 마법사를 찾아 떠났던 도로시 일행과, 행복을 찾아 파랑새를 찾으러 나섰던 치르치르와 미치르, 이상/理想을 향해 말을 몰고 떠나는 돈키호테, 이 모두가 부럽습니다. 그들이 찾은 교훈과 행복한 결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지 않아도 되고, 언제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는 점에서요.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며칠의 여행도 현실을 걱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떠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마음이 막힘없이 자유로운 사람이 가장 부럽습니다. <KBS FM 1, 가정음악, 2009318일 방송>

 

2. 사순절 다섯째 주일의 구약성경 렘 31:31-34을 본문으로 새 계약의 특징들이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문명사회란 복잡다단한 사회 구성원들을 질서정연하게 통제할 수 있는 규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나라는 자신들만의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에 따른 규약들과 시행령을 만들어 사회와 나라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 계약이라는 말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개정된 새로운 규율이 필요해졌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새 계약이란 어떤 것입니까?

 

예레미야가 소개하는 새 계약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31-33).

선거철이 되면 사람들은 많은 변화를 기대하기도 하고 실제로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는 내용이 달라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용을 바꾸는 일은 엄청난 비용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시간도 필요하고, 절차와 과정이 복잡할 뿐 아니라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형식을 바꾸는 것은 그에 비해서 훨씬 더 단순하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과 맺었던 계약의 내용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그의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약 내용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새 계약을 요청하는 쪽이 하나님이라는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약을 지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맺게 될 새 계약은 종이나 돌에 새긴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의 가슴에 새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시니 이스라엘은 가슴에 새긴 계약을 갖게 되었습니다.

 

새 계약을 가슴에 새기는 효과는 그 백성을 용서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34).

유대교나 기독교의 진리를 오해하거나 곡해하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문제는 모든 문제 풀이의 주체를 인간 편에 두는 일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더욱 더 철저히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려 하는 것이고, 기독교의 아류들은(알미니안) 하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 미안해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자유의지로 자기 공로를 발휘하려고 합니다.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방법입니다. 이는 일반 종교가 주장하는 선행과 수행으로 완덕/完德에 이르려는 노력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성경의 중심점이라고 할 요 3:16은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가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이고, 진리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이 십자가의 도를 구원의 표지/標紙로 삼았고 증거하였습니다.

 

새 계약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뿐 아니라, 기독교 구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4:12, 21: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예수를 변호하며 외친 증언입니다. 이 증언은 기독교는 더 이상 종이나 돌비에 기록된 계약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령에 새겨진 계약을 지킬 무리임을 온 천하에 밝힌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질문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옛 계약은 무엇이고, 새 계약은 무엇입니까? 옛 계약은 종이와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 곧 십계명을 비롯한 613가지 계명들입니다. 그렇다면 새 계약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을 믿는 그 한가지 입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 예표가 유대광야에서 시연되었고, 모세가 바로 그 증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약속인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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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자료 8339(2024. 3. 16. 토요일).

시편 시 51:14-16.

찬송 373.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말은 소리 내어 말하는 순간, 더 마음을 허망하게 합니다. 마음 안에 담겨 있을 때는, 명백한 진실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터무니없는 거짓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렇지만 그 마음이 언어가 돼서 입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말은 그 자체로 진짜가 되어 버립니다. 마음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지요. 그 후에 남은 것은 하나뿐입니다. 현실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거겠지요. 그것이 비록 스스로가 원했던 현실은 아니라고 해도 말입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크게 소리 띄워 강변으로 보내면/ 사랑한다 사랑한다/ 혼자 메아리로 돌아오는 이 말/ 나로부터 떠난 수도 없는 너를/ 정처 없이 찾아 나서면/ 눈앞을 가리는 안개 비/ 너의 따스한 이별/ 사랑한다 사랑한다/ 크게 소리 띄워 강변으로 보내면/ 사랑한다 사랑한다/ 혼자 메아리로 돌아오는 이 말

    마음을 다해 강변에서 힘껏 외친 고백은, 혼자 메아리로 되돌아옵니다. 서로의 마음이 닿지 못하는 순간의 허망한 마음을 시인은 글로 옮겨 놓았지요. 작곡가는 글이 지닌 쓸쓸한 심상을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달래주듯, 조금은 따뜻한 곡으로 옮겨냈습니다. 1987년 대학 가곡 제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작곡가로써 가능성을 인정받았습니다만, 작곡가 김 희정의 가곡 작품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소월의 시에 작곡을 한 <가는 길>과 노 유섭 시인의 글에 곡을 붙인 <사랑꽃 바다>가 비교적 친숙하지요. 박 희영 시 김 희정 곡 <너의 이별>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17일 방송>

 

2. “사랑(4-13)”을 읽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 부산 YWCA <규수학당>의 강사가 되었습니다. 제게 맡겨진 강의 주제는 기독교의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달콤한 사랑에 취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랑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의의 구도를 설정했습니다.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는 좋은 점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나, 어느 정도 상대를 이해할 즈음에는 단점도 눈에 들어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결혼식을 치르고 나면 상대방에게서 좋은 점보다는 단점들 보고 싶지 않은 점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급한 사람들은 별거를 하거나 심할 경우에는 이혼까지도 불사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문제는 거의 대부분의 커플들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때부터 사랑의 아픔이 시작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름 해답을 제시합니다. 우리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람의 한쪽만이 아니라 다른 한쪽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랑하고 싶은 앞면만이 아니라 감추고 싶은 뒷면도 함께 사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요구하시는 올바른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장점만이 아니라 단점도 사랑하고, 보여주고 싶은 점만이 아니라 감추고 싶은 점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아픔을 동반한다고 말입니다.

    이때의 <규수학당>의 경험을 토대로 저의 결혼식 주례사는 진정한 사랑은 아픔이 있어야 한다.”는 주제로 담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 전서 13장의 주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아니면 진정한 사랑을 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적어도 6가지의 긍정적인 행동과 9가지의 소극적인 행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면에 나타난 6가지 모습과(친절함, 진리를 기뻐함, 덮어 줌, 믿고, 바라고, 견딤), 뒷면에 나타난 9가지 모습을(오래 참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사욕을 품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을 다 함께 감싸 안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사랑하고 싶지 않은 점을 사랑하려니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내 것으로 삼아야 하니까 고민이 생기고 걱정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적어도 결혼을 하기 전에 사랑의 약점을 발견하고 이를 잘 감싸 안을 수 있는지를 충분히 고민한 후에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은 아름답고 황홀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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