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330(2024. 3. 7. 목요일).

시편 시 50:9-11.

찬송 22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작품의 위대함을 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각자의 공간에서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을, 예술이란 이름 앞에 하나로 묶어줄 때가 그런데요. 예술작품 이 주는 공감과 감동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은 짧은 순간이나마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짧은 기억으로 서로에게서 희망과 가능성을 읽어내지요. 비록 살아온 시간은 다릅니다만, 그 마음 안에는 크게 다르지 않은 것들이 들어있다는 걸 말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 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의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곳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한 때 이 곡은 애국가보다도 더 많이 부른다는 통계를 얻기도 했습니다. 흔한 표현이기는 합니다만 정말 남녀노소의 구분이 없이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아련한 향수를 가지고 부르는 곡이 <고향의 봄>이 아닐까요? 아동 문학가였던 이 원수가 14의 나이에 지은 시였습니다. 작곡가 홍 난파가 곡을 붙여 만든 노래가 바로 이 작품이지요. 글을 쓴 이 원수는 당시 마산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마산에서 우연히 방 정환을 만나, 그 인연으로 잡지 [어린이]에 원고를 보내면서 이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요. 이 원수의 고향은 본래 양산입니다. 하지만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창원으로 이사를 갔고, 결국 글쓴이가 그렸던 <고향의 봄>은 자란 곳인 창원의 봄을 말하는 내용이었지요. 고향의 개울이나 꽃 수양버들, 지금은 누구에게나 더욱 그리운 존재가 되어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원수시 홍 난파 곡 <고향의 봄>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6일 방송>

 

2. “사도의 권리와 의무(1-15)”을 읽었습니다. 70년대의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를 구독할 때 어떤 분이 권 정생 선생의 일화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생전에 3차례 아동문학상을 받으셨는데, 한번은 아동 문학가들이 모임을 갖는데 꼭 참석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안동에서 새벽같이 일어나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모임시간보다 일찍 장소에 도착하셨더랍니다. 그런데 안동 일직의 작은 교회당 종지기로 일하던 터라 행색이 변변치 못했는지, 건물 경비원이 들어가지 못하게 막더랍니다. 그래서 아동문학가 모임에 참석하러 왔으니 들어가게 해달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막아서서 경비실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차려입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지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알아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몇 사람이 서둘러 내려와서 이름을 묻더랍니다. 그렇게 해서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권 정생 선생님은 주변머리도 없는 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알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다리기만 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흙속의 진주를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단 옷을 걸친 사람이라면 어디에서건 주변의 시선을 다 끌어 모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겉모습에 머물 뿐, 한 치도 더 깊게 들여다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을 평생 괴롭혔던 문제 당신이 과연 예수의 사도인가?”였는데, 사도 스스로 이 문제에 불길을 지핀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없이 퍼붓듯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사도가 아니란 말인가?”, “내가 주 예수를 뵙지 못했단 말인가?” 그리고 여러분은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하여 얻은 열매가 아닙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여러분에게 사도이며, 이를 증명할 확실한 표라고 말입니다.

    사도는 느닷없이 사도의 권리를 꺼내들었는데, 주님의 형제들과 베드로 그리고 바나바를 끌어들여 자신과 비교합니다. 가정을 이루지 못한 자신을 비교하고, 일정/一定의 생활비를 받지 않는 자신을 비교한 것입니다. 자기 비용을 써가면서 군인 노릇하는 사람이나, 아무 대가없이 포도밭을 일구는 노동자나 양치기를 소환해서 그런 사람들이 있을 턱이 없는데도 엉뚱하게 이들을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은 정당한 품삯을 치르거나 적절한 사례를 한 경우가 아니면, 질이 떨어지거나 능력이 부족한 경우로 생각하고 무시하는 경우가 많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통념을 따르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9절 이하에서 사도는 모세의 율법을 소환해서, “타작마당에서 일하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25:4)을 인용하면서, 이 말씀은 소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농부인 우리들을 걱정하신 말씀이라고 해설을 붙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사도권에 대한 사도의 단호한 주장은, 자신의 권리를 물질적인 의미에서 되찾겠다는 뜻이 아니라, 진심에서 나오는 존경과 사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훗날 우리가 받을 상급과도 같이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29(2024. 3. 6. 수요일).

시편 시 50:7-8.

찬송 35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상이나 이념은 예술가에게 고단한 것이었습니다. 뚜렷하면 뚜렷한 대로 그렇지 않으면 않은 대로, 예술가들은 기득권에게 휘둘리며 살아가는 일이 많았지요. 짧은 기간 동안 개화기와 식민통치의 시기, 그리고 정치 이념의 대립과 전쟁을 치러내야 했던 우리의 경우엔 더욱 그랬습니다. 정세가 바뀌고 통치하는 사람들의 이념이 바뀔 때마다, 예술가들의 삶은 휘둘러야만 했지요. 앞서 걸어 나갔던 사람이나 시류에 편승했던 사람의 구분도 없었습니다. 더불어 예술적인 업적은 그의 정치적 성향만으로, 폄하되거나 훼손되기 일쑤였지요.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작곡가 김 순남의 본명은 김 현명이었습니다. 보통학교 교사였던 어머니에게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우며, 음악을 본격적으로 배웠지요. 조선 최고의 작곡가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작곡가 김 순남의 재능은 뛰어났습니다. 그렇지만 일본 유학 후 귀국한 김 순남에게는, 사상이라는 벽이 생겼지요. 좌익과 우익으로 대표되는 사상의 대립이 깊어지면서, 김 순남의 음악활동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김순남은 이 곡이 수록된 가곡집 [산유화]를 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음악 교과서에 김 순남의 <건국 행진곡>이 수록된 1947년의 일이었지요. 그렇지만 같은 해 좌익 운동이 비 합법화 되고, 이듬해인 1948년 김 순남에겐 체포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리고 체포령을 피해 월북하면서, 김 순남의 음악은 한 동안 지하에 묻혀있어야만 했지요. 김 소월 시 김 순남 곡 <산유화>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5일 방송>

 

2. “우상 앞에 놓았던 제물(1-13)”을 읽었습니다. 신앙이란 생활과 연결된 것이어서 복잡해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어제 국민일보에는 1030세대에게 기도제목 3가지를 적게 하고, 그들이 평소 즐겨 사용하는 대표적인 온라인 플랫폼인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 톡에 기도제목과 관계된 키워드와 문장을 올리는 실험을 하였는데, “실험 결과 10~30대 크리스천들은 자신들의 기도제목과는 달리 상당히 다른 일상을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408명으로부터 파악한 5234개의 키워드와 문장을 분석한 결과 기도제목과 3개 플랫폼 관심사 내용이 모두 일치하는 크리스천은 100명 중 7(6.8%)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기도제목과 플랫폼에 남아있는 관심사가 하나도 일치하지 않는 크리스천은 그보다 2배 이상 많은 15.8%에 달했다. 자신의 기도제목과 일상적 관심 사이에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 한국 교회는 유일하게 정통 유대교도들과 비슷하게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강조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비기독교인 들이 말하는 대로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초기 선교사들이 청교도 신앙을 강조하는 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자유롭게 개방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유독 한국선교에서만은 금주와 금연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제가 되는 제사 음식에 관해서도 매우 엄격한 잣대로 가르친 것입니다. 이 또한 청교도인 자신들이 신학교에서는 아디아포라의 문제인 것을 잘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선교에서만은 심각하게 구원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가르쳐왔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푸줏간에 나온 소머리는 여러 집의 제상에 올려졌다가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누군가가 그 소머리를 사다가 먹었을 것입니다. 예전 제가 어릴 때만해도 시골 마을에서는 제사상에 올렸던 제사음식을 이웃끼리 나누어먹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물론 잘 믿는다고 소문난 집에는 제사음식을 보내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제사 음식을 먹으면 제사를 지낸 사람과 동일한 죄를 짓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따져본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우상과 무관한 것들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밥상에 올라온 굴비는 풍어제를 드리고 잡아온 고기이고, 우리가 입는 천이나 옷감 그리고 완제품인 옷은 최소한 고사를 지내고 시작한 공장의 제품이었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타고 다니는 대중교통이나 잠실야구장 역시 고사를 지낸 후에 이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디아포라 문제>입니다. 요약하면 구원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문제를 취급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이를 바울 사도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한 분 뿐이시지만, 세상 사람들은 수 백 수천의 신을 섬기고 있다는 말로 그 차별화를 분명히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돌이나 나무 형상을 신이라고 우기는 것을 우리가 굳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헛된 일에 기운 빼는 것은 그들의 몫으로 두자는 얘기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28(2024. 3. 5. 화요일).

시편 시 50:4-6.

찬송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흔히 현대음악이라고 하면, 조금은 듣기에 불편하고 심지어 기괴스럽다 느껴질 수도 있는 음악을 떠올리곤 합니다. 본래도 현대 음악가들은 그 수가 많지 않았습니다만, 특히나 우리나라에서 현대음악을 다룬 사람은 더 적었지요. 이러한 한국 현대음악 역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작곡가 백 병동입니다. 백 병동은 서울대 작곡과를 거쳐 독일에서 윤 이상을 사사했지요. 그리고 백병동의 음악은 한국의 현대음악 가운데 서정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 가디/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을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 건 웃지요

    학창시절 자주 외던 싯구절을 가곡으로 만나서인지, 더욱 반가운 기분이 듭니다. 백병동의 음악은 남다른 서정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음악이 지닌 현대 음악 특유의 개성 때문에 대중들에게 큰 사랑을 받진 못했습니다. 그 가운데서 이 곡 <남으로 창을 내겠소>와 함께 <자장가> <빨간 석류>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많지 않은 작품 중의 하나이지요. 백병동의 음악은 우리의 음계를 토대로 독주곡 실내악곡, 관현악 오페라 칸타타 등 대양한 분야에 걸쳐 100곡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날카로운 음악적 직관과 따뜻한 서정은, 작곡가 백 병동을 한국 현대음악계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꼽는데 일조했지요. 끊임없는 실험과 체험으로 소리를 만들어갔던 작곡가 백 병동의 수작가운데 한 곡입니다. 김 상용시 백 병동 곡 <남으로 창을 내겠소>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3일 방송>

 

2. “종말을 목전에 둔 미혼 남녀들 2(32-40)”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매우 흥미로운 구절들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그 때문에 낭패를 볼 때가 적지 않습니다. 어제 읽은 25절이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구절을 다시 언급하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읽어야하는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제와 오늘 읽은 사도의 권고는 순전히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도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이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사도의 말처럼 성경을 기록한 사람의 개인적인 견해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와 같은 자신의 견해를 믿어도 좋겠다고 말하는데, 자신이 주님의 자비를 입은 사람이라는 보증수표를(?) 내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나 저나 사도가 그동안 보여준 신실함이나 진실성을 토대로 믿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권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는 약혼을 한 관계든 아니든 간에 할 수만 있다면 결혼하지 않는 편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명백합니다. 첫째는 세상일에나 결혼 상대자에게 너무 많은 신경을 써서 주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욕정만 다스릴 수 있다고 한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은 처세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불가피하게 결혼하게 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교우와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권고가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초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관해서 진지한 이해가 필요한 사람들이 현대 젊은이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삶의 의미와 목적이 세속적인 가치로 무장되어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것은 무리수로 생각되는 때문입니다. 19767월 제가 아직 목사 안수를 받기 2달 전에 막 공사를 마친 15평짜리 교회당에서 젊은이들아, 우리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현수막을 걸고 중 고등학생을 위한 신앙 강좌를 열었던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저의 생각은 분명했습니다. 신앙적인 접근보다는 철학적인 접근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한 때문입니다. 멀리 계신다고 생각하는 하나님 보다는 매일 거울로 들여다보는 못나고 바보 같아 보이는 자기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던 때문입니다. 사흘 동안 저녁마다 가졌던 한 시간짜리 강의에서 저는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내다보자 말했습니다. 효과는 만점이었습니다. 서른 명쯤의 학생을 얻었고, 그들로 여름 성경학교의 교사 훈련을 받게 했습니다. 학생 신분에서 교사 신분으로 수직 상승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들의 열정과 창의력은 아파트 단지를 북을 치며 도는 등 성경학교 홍보를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삶의 의미도 모르는 성도들에게 격에 맞지 않은 영계의 세계만을 강조한 나머지 감격도 소망도 없는 텅 빈 신앙을 주입시켰는지 모릅니다.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은 부실한 신앙의 열매가 오늘에 이른 것 아닐까 합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27(2024. 3. 4. 월요일).

시편 시 50:1-3.

찬송 16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작곡가 오 숙자는 지금의 시대를 만남의 시대라고 칭했습니다. 시대와 시대 사람과 사람 다양한 예술의 장르까지도, 서로 만나 조화를 이루는 시간이 바로 지금이라고 했지요. 서로 화합하고 융화하는 것이 전하는 의미를, 음악 안에 담아내는 것이 곡을 쓰는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원술랑> <동방의 가인 황진이> 같은 오페라들은, 작곡가 오 숙자의 그러한 인생관과 음악관 안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지요. 조금은 이색적인 느낌의 가곡도 있습니다만, 작곡가 오 숙자의 작품들은 그의 인생관을 닮아 온화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곡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스름 강물 달빛/ 남실남실 밤새가 우네/ 해지도록 열두 번도 더 매만지던 편지를 뜯네/ 겉봉이 열리자 우수수 쏟아져 내리는 수수꽃 다리 내음/ 폭포가 흘러넘쳐 수다의 웃음판을 펼쳐 놓네/ 밤늦도록 접고 다시 펼치고/ 중천의 달이 쑥스럽다 저 혼자 웃네/ 환히 웃네/ 흘러 끝없이 강물이 흘러가도 강은 늘 그 자리/ 떠나지 못하는 건 강 저 뿐만이 아니라 하네

    20076월에 열렸던 서울 합창제를 통해 발표된 곡입니다. 낮에 건네받은 편지를 내내 만지작거리다가, 밤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열어보는 그 마음을, 시인은 정제된 시어로 담아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가 건네는 잔잔한 여운을 작곡가는 곡으로 옮겨냈지요. 수수꽃다리 내음이라는 말의 어감이 향토적이면서도 참 다감합니다. 방언이긴 합니다만, 내음이라는 말은 냄새나 향기로 다 담아내기 힘든 끈끈한 감성을 말 안에 지니고 있지요. 송 문원 시 오 숙자 곡 <봄 편지>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4일 방송>

 

2. “종말을 목전에 둔 미혼 남녀들(25-31)”을 읽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종말관의 피해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소위 <이 장림의 다미선교회 휴거 사기사건>입니다. 그 내용은 19921028일 다미선교회원들은 공중으로 불려 올라가는 종말사건을 경험할 것이라는 주장을 폈는데, 사기로 밝혀졌고, 1992124일 서울 형사지법에서 징역 1년에 $26,000 몰수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유사한 사기사건 들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 예견된다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표적인 임박한 종말론(Impending Eschatology)의 예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 역시 그의 초기 신학에서는 임박한 종말관을 믿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박한 종말론의 관용어가 두 구절 나오는데, “이제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29)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사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31) 그래서 미혼인 남녀는 결혼하지 말 것을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26-27). 그리고 이미 결혼한 사람들도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살 것을 권고합니다. 이렇듯 성경에는 임박한 종말관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그러니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니, 세상일에 깊이 개입하지도 말고, 주님 맞을 준비에 충실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가하면 성경은 언젠가는 주님께서 오실 것인데, 도적이 들어오는 것처럼 언제 들어올지 모르니 주의하라는 미래적 종말관이 있고, 이미 너희 마음속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였다는 실현된 종말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는 적어도 3가지 종류의 종말관이 소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주 질문을 받습니다. 어느 것이 성경적인지 가르쳐달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은 3가지 종말관은 모두 다 옳은 가르침이라고 말입니다. 세 가지 종말관은 그 용도가 다양한 때문입니다. 그 하나가 개인적인 종말과 우주적인 파국으로써 종말로 나눠서 생각해야 하는 때문입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가게 되는 것은 임박한 종말관으로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적어도 그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 그 다음에 그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은 부활 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신 앞에 다가오는 종말을 성실하게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주적인 파국은 하나님만이 아시는 그 어느 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그 종말관은 미래적 종말관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서가 가르치는 대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은 그 자신 작은 천국을 맛보며 살아갈 것임으로 실현된 종말을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충분한 설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만, 성경의 종말관은 모두 개인적이든 우주적이든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염두에 두고 준비하며 살아야 할 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26호.

시편 시 49:16-20.

찬송 40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어. 처음부터 자라는 것은 어림도 없지. 하지만 날마다 연습하면 어느 순간 너도 모르게 어려운 역경들을 벌떡 들어 올리는 널 발견하게 될 거야. 장 미란 선수의 어깨가 처음부터 그 무거운 것을 들어 올렸던 것은 아니잖아?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날마다 조금씩 그리고 가보는 것, 조금씩 어쨌든 그 쪽으로 가보려는 것, 그건 꼭 보답을 받아.” 공 지영 작가의 신작 에세이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중 에서 전해드렸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으면 겪을수록, 마음 속 근육이 점점 단단해 져서 나중에는 더 큰 어려움도 감당할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 말이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위로와 용기로 전해졌으면 합니다. <KBS FM 1, 새아침의 클래식, 200933일 방송>

 

2. 사순절 셋째 주일의 사도서간 고전 1:18-31을 본문으로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자.”란 제목으로 설교하려고 합니다. 불교가 사성제 팔정도를 구원의 진리라 한다면, 기독교회의 진리는 십자가의 도/라고 해야 합니다. 죄와 죽음에 빠진 인간을 대신해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이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입니다(3:16).

 

고린도 교회는 십자가의 (진리)에 대해 심각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18-23).

십자가의 도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감스럽게도 십자가의 도는 기독교회의 중심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강조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 상징인 십자가를 스크린으로 가려버리는 교회들도 많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1세기 고린도 교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의 주장은 언급하면서도 정작 교회의 변호는 사도가 대신하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에 대한 유대인들의 주장은 오점(스캔들)에 불과하고,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짓(몰리아)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악의 시궁창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십자가의 도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힘이고 하나님의 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현현이라고(5:8)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만 열려 있는 진리였습니다(24-25).

구약에 선민사상이 있다고 하면, 신약에는 부르심이라는 사상이 있습니다. 선민사상이란 세상에 있는 많은 민족 중에서 특별히 택함을 받은 백성, 곧 히브리 민족으로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고 있습니다(12:1-3). 그런데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히브리 민족에게만 복을 주시려는 뜻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 민족을 일꾼으로 삼아서 세상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려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정신은 신약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알게 하신 후, 십자가의 도를 세상 끝까지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선민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은 하나님의 현존인 말씀을 맡은 것입니다.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고 증거할 책임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고 전파할 과제를 모든 크리스천에게 맡겨주셨습니다(26-31).

십자가의 도는 사람이 꾸며낸 신화나 영웅담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전하는 하나님의 지혜는 무슨 요술방망이처럼 어리석고 미련한 자를 불러내어 세상에서 지혜롭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고, 세상에서 강하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려고 가장 약한 자들을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9:23 을 인용하였는데, “누구든지 자랑하려거든 주님을 자랑하시오.”라고 말입니다. 요즘 들려오는 소식들은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신대원 졸업생 6명중 한 명만이 목회현장에 파송된다고 하며, 농어촌 교회는 목회자가 떠나가고 있다 합니다.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도를 자랑하지 않고 십자가의 도를 전파하지 않는 때문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

묵상자료 8325(2024. 3. 2. 토요일).

시편 시 49:13-15.

찬송 499.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술은 그 시대상을 반영한다고 흔히들 말을 합니다. 당시 사랑받았던 예술작품 안에는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나 마음이 그대로 담겨져 있지요. 조금 바꾸어 말하면 시대의 조류를 반영하지 못하면, 도태된 존재라고도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작곡가 임 긍수는 우리 가곡이 사랑받기 위해서, 오랜 가곡의 형태를 계속 답습만 해서는 안 된다 말을 했습니다. 지금의 음악적 주류와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는 모습을 우리 가곡도 갖추어야한다. 그의 말처럼 임 긍수의 작품들은 가곡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지닌 곡들이 많았습니다. 지금의 음악이 지닌 장점과 대중의 취향을 반영한 감각적인 작품들이지요.

    “앞강의 살얼음은 언제나 풀릴거나/ 짐 실은 배가 저 만큼 새벽안개 헤쳐 왔네/ 연분홍 꽃다발 한 아름 안고서/ 물 건너 우련한 빛을 강마을에 내린다/ 앞강의 살얼음은 언제나 풀릴거나/ 짐 실은 배가 저만큼 새벽안개 헤쳐 왔네/ 오늘도 강물처럼 뗏목처럼 흐를거나/ 새소리 바람소리 물 흐르듯 나부끼네/ 내 마음 어둔 곳에 나의 몸 풀어놓아/ 화사한 그리움 말없이 흐르는구나/ 오늘도 강물 따라 땟물처럼 흐를거나/ 새소리 바람소리 물 흐르듯 나부끼네

    작곡가 임 긍수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을 했습니다. 첫 가곡인 <그대 창밖에서>를 시작으로, KBS 신작가곡 위촉으로 완성된 이곡 <강건너 봄이 오듯>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서, 우리 가곡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요.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선율과 현대적인 음악 어법으로 한국 가곡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현대적인 작곡가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오페라와 성가 곡들도 활발히 작곡하면서 이 시대를 대표하는 가곡 작곡가로 활동해 오고 있지요. 송 길자 시 임 긍수 곡 <강 건너 봄이 오듯> 소개해 드렸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932일 방송>

 

2.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대로(17-24)”을 읽었습니다. 어느 날 옛날 사진첩을 들추다 초등학교 동창이던 동네 친구와 찍은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그 사진은 친구가 쪼그린 채 앉아있고 저는 친구의 어깨를 한 손으로 누른 채 허리를 굽히고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진에 새겨진 글씨가 영원한 우정이라고 씌어 있었습니다. 고향을 지키는 동생이 그 친구의 전화번호를 알려주며 만나보고 싶어 하시더라는 말을 전해 주었습니다. 외지로 고등학교를 다니겠다고 고향을 떠난 지 4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친구가 산다는 지방으로 갈 기회가 생겨서 만났는데, 점심을 먹는 30분간을 제외하고는 마치 처음 만난 외국인을 대하듯 할 말이 없어서 곤혹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40년의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던 것입니다. ‘영원한 우정이라는 말은 40년을 견딜 수도 가당치도 진실하지도 않은 말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적어도 50년은 변함이 없는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함께 살아가던 시절에나 가능했을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개천에서 용이날 수도, 혁명이 일어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남자로,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으면 머슴의 아들로, 노비의 딸로 태어났으면 노비의 딸로 불만 없이 살아가라는 말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부르심을 받은 대로라는 말은 주님의 백성으로 불리기 전의 신분 상태 곧, 할례자는 할례자로, 무할례자는 무할례자로, 노예면 노예로, 자유인이면 자유인으로 그것을 운명처럼 껴안고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사도는 1세기 사회 구조를 뒤바꾸거나 흔들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은 한없이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5장을 보면 바울 사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 숭고함에 대해서 너무도 분명하게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죄와 죽음의 노예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말라고 강권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참 자유는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서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으로 누구나,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예외 없이 다 자유인이 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정죄할 사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가지 자유를 행사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의 종노릇을 하기 위해서라면, 남자든 여자든, 자유인이든 노예든, 금수저로 태어났든 흙수저로 태어났든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세상이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바뀔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로 끊임없는 시행착오와 로울러코스터를 타야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어디를 통과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지금 어디에 있든, 제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암시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십시오.”라는 권고가 바로 똑바른 정신을 갖고 사는 삶입니다.

 

3. 사공명옥 교장님이 빨리 정신을 차리고 묵상을 배달하라 명하셨습니다. 의욕을 상실한 초라한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220일부터 31일까지의 궐호/厥號 분은 3월 중에 채워드리겠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