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05호 (2007. 5. 31. 목요일).
시편 시 92:13-15.
찬송 359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 한 조사에 따르면, 회사를 경영하는 경영자들이 대부분 와인 때문에 한번쯤 스트레스를 반은 또이 있다고 조사가 됐네요. 많이 마셔야 된다는 지 또는 적게 마셔야 된다는 지 해서 받은 스트레스가 아닙니다. 와인에 대해서 잘 모르게 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라고 하네요. 와인을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는다든지, 와인의 값이나 맛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때, 또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시키면, 그 자리의 호스트에게 먼저 맛을 보도록 하는 그 역할, 그것이 영 어색하고 부담스러워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겁니다. 사실 와인이라는 이 프랑스에서 유래된 이 술에 관한 예절이나 단어들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지요. 그래서 와인 마시는 자리에 가면은 지레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와인은 전무가라 할지라도, 구별하기가 쉽지 않는 술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알려진 것과는 다른 점도 많다고 합니다. 가령 포도주는 오래될수록 무조건 좋은 게 아닐까? 그런 편견이 있는데요. 값이 낮은 경우에는 오히려 1,2년이 지났을 때가 가장 좋다고 하지요. 또 육류에는 래드 와인, 생선에는 와이트 와인 하는 것도, 대단한 공식처럼 이야기되어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잇다는 겁니다. 그리고 마시기 전에 매번 잔을 약간씩 흔들어 주는 게 좋긴 하지만, 그것 역시 아주 격식 있는 자리에서는 심하게 흔드는 것이 품위를 해치는 결례가 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구동성 소물리에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예법이나 전문 상식에 얽매이지 말고, 그냥 편안하게 즐기라고 중고 합니다. 무엇보다 와인 예법이나 용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정도면, 그래도 행복한 삶이 아닐는지요. 아무튼 술에 대한 예법이 됐든,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인생 예법이 됐든, 뭐든 너무 몰라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억매여서도 안 된다는 것, 늘 형식과 내용이 알맞은 조화를 이뤄야 편안하고 즐거워 질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KBS FM 1, FM가정음악, 2007년 4월 24일 방송>
2.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로 알려진 오늘의 말씀은 마치 모든 사마리아 사람들이 선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대칭이 되는 유대인들은 자연스럽게 나쁜 사람으로 매도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유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마리아 사람은 하나같이 못된 사람들이거나 나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한 때 유대인의 고유한 품위를 포기해 버린 정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재건할 때에 훼방꾼으로 온갖 못된 일들을 일삼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창작 속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보통의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라, 별종 사마리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특별한 사마리아인, 다시말하면 사마리아 사람에게서는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형아로 태어난 사람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서는 절대로 기대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저지른 사람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를 가지고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려고 한다면 처음부터 빗나간 수작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죽어가는 한 강도만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정해진 신분의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깨트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이 평판좋은 사람들도, 모두 다 사람구실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반면에 평생 사람구실 할 수 없을 것 처럼 살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도, 얼마든지 훌륭하게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함부로 사람을 어떤 틀에 집어넣고 바라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중요한 것은,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나서는 사람이야말로 좋은 이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정관념이라던지 혹은 편견이라는 것이 얼마나 세상과 사람을 잘못 바라보며 살게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좋은 이웃이란 아예 처음부터 정해진 어떤 부류의 사람이라고 정해 둬서는 안 되겠지요. 개신교인들은 불교인이라고 하면, 심지어 가톨릭 신자라고만 하면, 아예 마음의 문을 꽉 닫아 버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히려 무신앙인 사람보다도 훨씬 더 골 깊은 편견을 가지고 마음 한 구석에도 끼워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낯선 사람들에게 선교한다고 나서면, 별로 마음이 편치 않은 겁니다. 세상을 향해서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할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을 하는 좋은 이웃이 되는 길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좋은 이웃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둘러 보십시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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