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2210(2007. 6. 5. 화요일).

시편 시 94:16-19.

찬송 454.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서정가] 가운데서 인용합니다. “저는 지금 세상에서 당신의 사랑의 증거를 듣는다거나, 내세에서 당신의 연인이 되는 것 보다, 당신이나 제가 홍매나 협죽도의 꽃이 되어, 꽃가루를 나르는 나비에 의해 결혼하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1968년 인도의 타고르에 이어 동양에서 두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 아름다운 소설 [설국]으로 많이 알려진 그의 단편 [서정가] 역시, 줄거리보다 문체와 묘사가 아름다운 사랑 시와 같은 소설이지요. [서정가]의 첫 머리는 이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죽은 사람을 향해 말을 건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인간의 습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스에는 그렇게 이미 고인이 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며, 마치 그가 앞에 있는 듯 꽃에게 말을 겁니다. “당신이 철을 서둘러서 봉오리가 달린 홍매로 변해서 재생했다는 상상을 꾸며내어 지금 제 눈앞에 홍매를 향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이나 지금도 저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다스애의 그 절절한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었지요. 어느 날 밤 꽃이 만발한 바닷가 오솔길에서, 눈썹이 짙고 웃을 때 왼쪽 입술이 살짝 올라가는 청년과 만나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정말 현실에서 그 남자를 만나게 되지요. 숙부를 따라간 온천장 바닷가에서 만난 그 남자는 다스애를 보자 묻습니다. 거리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냐고. 다스애는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었고, 그는 쫓아가면서 계속 묻지요.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다스애는 남자에게 고백합니다. “전에 한번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와 함께 하는 곳마다, 전에 한번 간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는 게 이상했지요. 그리고 그와 함께 하는 일은 그 전에 언젠가 한번은 해 본 적이 잇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 후 남자가 찾을 때는, 부르기도 전에 곁에 달려가 있어줬지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합니다. 다스에는 그 때의 슬픔을 이렇게 말하지요. “저를 버리고 간 당신에게 대한 원망과, 당신을 빼앗아간 아야꼬에 대한 질투로, 매일 밤낮으로 괴로워 한 저는, 불쌍한 여자로 있기보다, 아예 아네모네 꽃 같은 것이 되는 편이 얼마나 행복할까 몇 번이나 생각했습니다. 당신이라는 연인이 있을 때, 제 눈물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볼을 적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이라는 애인을 잃었던 그 무렵, 제 눈물은 아침 눈뜰 때에 볼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잠자면서 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침잠에서 깨는 게 슬픈 일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여자는 남자의 죽음을 알게 되었고, 여자는 이렇게 슬퍼합니다. “그렇게도 사랑했던 우리들인데, 왜 당신의 혼은 자신의 죽음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을까요? 당신이나 저 어느 쪽인가의 혼의 수신국에 고장이 난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러면서 소설은 이런 여자의 독백으로 끝납니다. “당신이나 제가 꽃이 되어서 꽃가루를 나르는 나비에 의해 결혼하게 되는 것이 훨씬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난 뒤 이별 후에야, 비로소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게 된다고 하지요. 이별에 어떻게 대처하느냐 거기에 따라서 사랑의 크기를 가늠 할 수 잇겠습니다. 사랑을 버리지 못했던 여자, 남자가 죽은 후에도 그 사랑을 잊지 못해 꽃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했던 그런 사랑. 이런 마음은 아픈 집착일까요? 행복한 사랑일까요?<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07523일 방송>

 

2. 요사이 정치권은 어린 아이들 장난보다도 더 유치한 모습을 서슴치 않고 보여주는 것 같지 않으십니까? 조금 어른스러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원색적으로 상대방을 헐뜯는 것은 물론, 애국 애민은 혼자하듯 자화 자찬하는 꼴이 가관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품위있고 신사답게 자신을 알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누가 국민이 기대하는 후보인지 국민이 평가할 수 있도록 하면 되는데 말입니다. 일단 흠집을 내고 보자는 식이어서인지, 주목을 끌만한 말투와 악평을 총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마음쓰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라도 꼬투리를 잡아내려는 속셈이 훤히 보이는 말들입니다. 18년동안 허리가 꼬부라진 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안식일 회당으로 찾아온 그 불쌍한 여인을 예수님은 두말없이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야단법석을 떠는 것입니다. “허구한 날 다른 엿새가 있는데, 하필 안식일을 골라서 병을 고칠수 있느냐?”는 질책입니다. 18년을 고생하던 여인의 처지를 조금만 동정했다면, 절대로 그런 매정한 말은 할 수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이름으로,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억지가 통했었다니 참 딱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자식은 물론, 그들의 소나 나귀도 안식일에 마굿간에서 풀어 물을 먹이러 나가면서 말입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내가 있다고 생각해 보면 달랐을텐데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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