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059(2012. 6. 27. 수요일).

시편 14:4-7.

찬송 55.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앙투안은 친구들을 모아놓고 바보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선언합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탱파주의 소설 [나는 어떻게 바보가 되었나]에 나오는 이야기지요. 친구들은 경악하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앙투안은 전도유망한 지성인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보 선언문은 낭독합니다. 그 길고 긴 선언문 중에는 이런 대목이 있어요. “지성에는 뭔가 고상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그것이 저주일 뿐이라는 점을 깨달을 만큼 충분한 지성을 갖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지성의 겉모습과 지성 자체를 혼동하고 잘못된 편견으로 권위적인 모습을 부여하도록 당신에게 강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지성인이고 배운 사람으로서, 덜 영리한 소년소녀들에게 상처를 주고 비굴하게 만드는 일에 나도 모르게 한 몫 했던 학창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내가 얼마나 혐오하는지.” 앙투안은 심지어 지성인들을 시체 공사장 안에서 지내는 프랑켄슈타인 교수에 비유합니다. 인간을 만들려고 했지만, 괴물을 만들고 만 비극의 주인공이요. 그런데 앙투안이 바보가 되기로 결심한 가장 커다란 목적은 무엇보다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사회생활에 참예하기 위해서. 앙투안이 그동안 행해왔던 관대함과 이해심, 온갖 의문과 원칙들은 앙투안을 사람들로부터 멀어지게 했고, 그 때마다 상처를 받았지요. 그래서 바보가 되겠다는 겁니다. 앙투안이 바보가 되기 위해서 선택한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해하기를 잊고, 정치를 믿고, 멋진 옷을 구입하고, 낮이고 질문하기보다 눈앞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책보다 티브이를 즐겨보며, 머리를 쓰기보다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기. 그렇게 살았더니 아무런 꿈도 없이 자신을 팔수 있어서 정말 큰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감옥에 가지요. 앙투안이 되고 싶었던 건 그냥 바보가 아니라, 행복한 바보였는데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마르탱파주는 지성의 이면성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그들의 지성의 부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용기의 부재에서 나온다.” 그리곤 니체의 말도 인용하지요. “지성은 미친 말이다. 그 말에게는 고삐를 단단히 묶고 귀를 먹이고 씻겨주고 이따금씩 채찍도 써야 한다는 걸 배워야 한다.” 그래요. 미처 길들이지 못한 미친 말에 올라타는 사람은 남까지 해칠 수 있습니다. 인격 없이 지식만 지성만 쌓는 일은, 그만큼 위험 천만 합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2418일 방송>

 

2. 시대는 달라도 사람들의 희망과 관심사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들 역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 모릅니다할 일없는 사람들처럼 시간 낭비하며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시험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한 것입니다. 경기도 마석 미처 못 가서 오른 편에 모란 공원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자칭 예수라는 이의 묘비가 있습니다. 그 역시 33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만일 이런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고 하면, 저 역시 그에게 질문했을지 모릅니다. “하늘에서 온 표적을 보이라.”고 말입니다. 메시야이심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되묻기 방식으로 나옵니다. “천기를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고 말입니다. 날씨가 맑고 흐린 것은 잘 알면서도, 시대의 방향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느냐는 뜻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표적은 무엇일까? 새삼 생각을 고쳐볼 시간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미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 하나님의 뜻을 역행하던 선지자 요나는 결국 큰 고기 뱃속에 사흘을 갇혀 지냈습니다그리곤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에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니느웨에 멸망을 선언하였고, 그 도시가 회개해서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줄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이 요나의 역할을 하였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적이 없으니 말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일꾼이면서도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캄캄한 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의 생각에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답답하고 두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눈앞의 문제풀이의 한 답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죽은 후에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만, 제가 깨달은 말씀은 하나님의 동행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동행하시기만 하면, 사람이 사흘 동안이라도 고기 뱃속에서 지낼 수 있다는 뜻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요나처럼 불충한 일꾼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쓰시고 싶어 하신다면 그런 억지도 통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일하는 것을 그렇게 해석해 보았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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