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17호 (2013. 3. 12. 화요일).
시편 시 77:16-20.
찬송 336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2. 아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자식들 생각에서 한 치도 넘어서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서 그렇습니다. 교인들도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무지 수백 번 강조한 주제인데도 전혀 할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아무 고생도 없고 편하고 즐겁게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에게로 눈을 돌립니다. 내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표호하듯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음 따로 몸 따로 제멋대로 놀아 나지야 않는다고 하겠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조금만 복잡해도 짜증을 부리는 모습이, 체면 구기는 한 마디 들었다고 감정이 파도치는 속 좁음이 그렇습니다. 질투심은 어떻고요, 괜한 일에도 위풍당당하지는 않더라도 침착 의연함을 있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사도는 그 원인을 “마음은 원이로도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라는 변명으로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고 고백합니다. 죄를 품고 있는 한 아무리 고매하고 순수하고 따뜻한 품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별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죄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람이란 하나도 없으니 이런 낭패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즘 청문회 철이 되어서 유명 인사들을 주목하면서 더 이상 관상보기를 포기했습니다. 하나같이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이 엉망진창인삶을 살아왔음을 백일하에 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 인품으로 자질을 논한다는 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사람이 안 되어 있는 위인에게 나라 곡간을 맡길 수 있을까요? 그래도 최소한 기댈 양심이 살아 있는지를 확인해야 할 형편입니다. 죄가 우리의 정신과 생각을 지배한다면, 몸을 움직이고 그 결과는 곧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처럼 우리도 자신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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