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49(2013. 4. 13. 토요일).

시편 시 84:1-4.

찬송 176.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어깨를 부딪치고 지나가거나, 다른 차가 앞으로 끼어들기를 시도한다든가, 옆 사람이 청량음료를 쏟거나, 누구라도 이런 일을 겪으면, 불쾌지수가 슬쩍 올라갑니다. 그러나 유난히 못 참고 발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욱하는 성격이지요. 본인은 화가 날만한 일이라서 화를 낸다고 주장하지만요. 옆에서 보면 작은 불씨만 붙어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지는 시한폭탄처럼 불안해 보입니다. 그들이라고 자신의 욱하는 성격을 모르지는 않습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서 손해를 많이 보니까요. 그런데도 쉽게 고치지 못하는 이유를 물으면, 대부분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고요. 그들은 왜 욱하는 성격이 됐을까요?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남들보다 유난히 스트레스에 민감해서 극단적으로 반응하도록 구조화되어 있을지 모른다고 합니다. 스트레스에 극단적으로 반응하는 방식에는 욱하는 것처럼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일 수 있지만, 반대로 두려움에 떨거나 자기만의 세계로 침잠하는 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 공통점이 있었는데요. 바로 성장 배경입니다. 자주 다툼을 벌이는 부모, 혹독한 벌을 주거나 사사건건 개입하는 부모, 그리고 불안정한 가정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빠르고 격렬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스트레스 요인이 사라지지만, 한 두 시간 내에 화가 저절로 가라앉는 정상인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쉽게 진정하지 못했는데요. 이 연구를 진행한 애리조나대학 브루스윌리스 교수는 말했습니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생물학적 수준 즉 본능에 따라 반응하며 위협을 물리치는데 더 많은 노력과 에너지를 쏟는다고요.

   어떻게 보면 늘 경계태세 긴장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당연히 행복해지기 힘들겠지요. 부모와 가정환경이 자녀의 성격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자신의 부모와 자신의 가정환경에 대해서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야기에 귀를 기우리면, 평소에 이해하기 힘들었던 모습이, 마치 퍼즐 맞추듯이 맞춰지며 이해될 때가 많은데요. 어떤 의미에서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을 이해한다는 말과 같은 뜻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 솔직한 대화이겠지요.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315일 방송>

 

2.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결국 시험을 받게 되셨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궁금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시험이란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성령에 충만해진 사람이라면, 유혹으로부터는 더 멀리 떨어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다른 것이 끼일 틈이 없을 정도로 온통 성령으로만 가득 채워진 상태에서, 유혹이 스며들 자리가 없어야 당연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유혹을 받게 되셨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성령께서 유혹받는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는 의미 외에 다른 말이 아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의 의지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성령의 강권하심으로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듯,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는 순 기능을 하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전혀 낯설게도 유혹을 경험하도록 그 유혹 한 복판으로 인도하신 성령의 모습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주님을 유혹의 자리로 안내하듯, 우리들에게도 그리하실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적절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목회 초년생일 때, 한 중견 선배 목사님이 이런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할수록 유혹이 더 잘 많아지고 유혹이 더 가까이 있는 것 같다고 말입니다. 오순절 계통의 부흥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분이셨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저는 그 말에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경우는 특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유혹의 골짜기로 찾아들 수 없음을 에둘러 말해야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경험하신 유혹은 순전히 성령께서 그 분을 억지로 끌어다 놓으신 것이었다고 말입니다. 육신을 가지셨으나, 원형(原型-proto type)으로써 육신이었기에 죄가 없으신 육신을 가지셨다고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할 수 있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외도(外道)였다고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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