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368(2013. 5. 2. 목요일).

시편 시 89:3-6.

찬송 44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1962년에 켄 케시의 소설로 처음 발표된 이후에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졌고요. 모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는데요. 제목만 놓고 보면 맞지 않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뻐꾸기는 둥지를 만들지 않으니까요. 작가는 어떤 의미로 맞지 않는 말을 제목으로 삼았을까요? 뻐꾸기는 속어로 정신병자를 뜻하고, 뻐꾸기 둥지는 정신병원을 의미합니다. 작품 속에서 정신병원은 기계들로 가득 차 있고, 규칙을 어기거나 불결한 것은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데요. 작가는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획일적인 사회를 정신병원에 또 비유했던 겁니다. 비유했던 겁니다. 사회가 원하지 않는 행동과 태도를 보이는 사람 정신병자에, 그리고 뻐꾸기. 이 연결고리가 참 절묘합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뻐꾸기는 남의 둥지에 알을 낳고, 심지어 본래 주인의 알을 먹어 없애기까지 하는데, 인간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런 뻐꾸기의 행동은, 최소한의 윤리나 양심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염치없이 행동하는 사람을 뻐꾸기에 비유하곤 하는데요. 정말로 뻐꾸기는 모정을 모르는 염치없는 새일까요? 뻐꾸기는 스스로 둥지를 만들거나 알을 품고 새끼를 키우는 방식을,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오랜 진화의 결과인데요.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뻐꾸기라는 종이 살아 남았다는 건, 둥지를 만들지 않고 새끼를 돌보지 않는 상태에서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해서, 나름대로 힘겹게 생존방식을 모색했다는 뜻이 됩니다. 뻐꾸기는 산란시기가 비슷한 새의 둥지를 노리고, 어미가 둥지를 비운 사이에 재빨리 들어가서 알을 낳고 떠나는데요. 둥지에 처음부터 있었던 전체 알의 수와 맞춰놓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어미 새가 다 속는 것은 아니지요. 자기 새끼가 아닌 것을 눈치 채, 가차 없이 죽이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뻐꾸기는 산란시기가 비슷한 다른 새들의 알과, 비슷한 색의 알을 낳는 방식을 택하지요. 그리고는 멀리서 제 새끼가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울음소리를 새끼에게 들려줍니다. 대부분의 새들이 짝을 찾기 위해서 열심히 울 때, 뻐꾸기는 다른 둥지에서 태어난 자식이 다른 새 소리를 내지 않고 뻐꾸기 소리를 낼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지요. 여름에 뻐꾸기 소리가 많이 들리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라고 하는데요. 스스로 둥지를 만들 줄도 모르고 새끼를 기를 줄도 모르는, 뻐꾸기의 눈물겨운 생존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정신병자를 가리키는 속어가 되고, 염치없다는 뜻의 대명사가 된 것은, 다른 새들과는 다르다는 이유 때문이겠지요. 그래서 한편으로 남들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시선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KBS FM 1, 출발 FM과 함께, 2013328일 방송>

 

2.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화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도대체 귀신들렸다는 말은 무엇이고, 제정신 아닌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경제논리에 밀려서 예수님이 배척을 받았다는 점이 그런 까닭입니다. 귀신들린 사람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들. 어디 예수님 시대만의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정신 줄 놓고 사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요즘 일본의 아베총리가 그런 인물 같아 보입니다. 정치가의 행보니까 뭔가 노림수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야스꾸니 신사의 인물들을 영웅으로 추앙하려는 그 시도는 물론이려니와, 주변 국가들과 좌충우돌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계2차 대전을 일으키고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안겨준 전쟁광들을 칭송한다면, 누가보아도 또 다른 패권주의를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을 갖게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정신 아닌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온갖 탈법 불법을 일삼아서 검찰에 고소 고발된 교회 지도자가 영웅처럼 대접받는 우리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어쩌다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치밀한 준비와 계획을 수행한 이런 잘못들을 너그럽게 감싸 안아주는 우리 교계가 귀신들린 형국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수백 마리 돼지 떼의 희생을 치르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 혹은 사람의 영혼이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를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정반대의 기류 속에서 황금만능을 추구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문제이지만,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세상도 그 못지않게 문제라 하겠습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