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4578호(2013. 11. 28. 목요일).
시편 시 139:1-4.
찬송 533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무심코 아버지가 틀어놓은 바둑 방송을 본 적이 있습니다. 봤다기 보다는 자신은 그저 시선만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실수를 했겠지요. 화면 왼쪽과 오른 쪽 양쪽 가장자리로, 대국중인 두 프로기사의 이름이 세로로 길게 적혀 있었습니다. 왼쪽의 프로 기사의 이름은 백김일동이었습니다. “이름이 네 글자네. 특이한 이름이다.” 생각했습니다. 오른 쪽에 세로로 적힌 이름을 봤습니다. 흑정철수였습니다. 그 정도면 얼른 알았어야 했습니다. 아, 맨 위쪽의 백과 흑은 성이 아니라, 백돌 흑돌 흰 돌과 검은 돌을 쥔 쪽을 구분하는구나,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못하니 옆에서 보시던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저 두 사람은 이름이 똑 같이 네 글자네요. 거기다 흑씨 성을 가진 사람도 있고요. 참 신기하네.” 아버지는 물론 옆에 있던 오빠까지도 자신을 쳐다봤습니다. 오빠는 얼른 설명도 해 주었습니다. “어, 중국에서 귀화한 프로 기사야. 그래서 성이 흑씨야.” 오빠의 말에 큭큭 웃음이 섞이고, 아버지도 웃음을 못 참는 바람에 알게 됐습니다. 자신도 웃음이 나오면서 믿기질 않았습니다. 누가 봐도 단숨에 구분될 걸, 구분할 수 있는 걸, 어떻게 그렇게 완전히 착각했을까? 눈도 머리도 가끔씩 믿을 게 못 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한참을 웃고 난 아버지는, 바둑에서 비롯된 고사 성어를 하나 들려주셨습니다. <각목팔목/刻木八目> 바둑을 두는 본인들 보다 옆에서 보는 관전자가, 바둑 전체를 보는 눈이 더 뛰어나다는 고사 성어였습니다. 이해관계가 직접 얽히지 않을 사람이, 냉정한 눈으로 상황을 더 잘 판단한다는 뜻이었습니다. <KBS FM 1. 노래의 날개위에, 2013년 9월 12일 방송>a.
2. 제가 가진 성경은 첫 단락 11-17절까지를 <국가에 대한 권면>이고, 두 번째 단락 18-25절의 주제어는 <고용주에 대한 권면>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모두 똑 같은 이해나 느낌을 갖는 것이 아니라서, 조금씩 혹은 제법 많이 다른 주제어를 사용할 수 있고, 또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전체 의미를 잘 찾아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주제어를 붙여놓은 성경을 읽는 일이 훨씬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주제어를 중심으로 본문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저는 모든 성경의 말씀은 의도하는 바가 있는데, 그것을 파악하지 못할 때처럼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낱말에 얽매이거나, 또는 아주 지엽적인 구절에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는 18-25절까지를 묵상하려고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기본 정신을 표방하면서도, 실제에 있어서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구성되고 유지되는 악습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높은 지위를 가지면 가질수록 더 많이 섬겨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행사하는 자리인 것처럼 오용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직무를 수행할 때만이 아니라, 아예 인간적으로 더 높은 차원의 사람이라도 된 양 거들먹 거리까지 한다는 말입니다. 가르치기 위해서 교사는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서로 섬기는 동등한 자연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분들도 그래야 합니다. 순서를 맡아서 단위에 올라갈 때에는 권위를 가지고 직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찬송을 부르거나 기도를 드릴 때는 평범한 예배자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제단에 예배봉사자들의 좌석을 두지 않는 게 좋습니다. 다른 예배자들과 같은 자리에 좌석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악습에 젖은 형편을 염두에 둔 권면입니다. 주인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얘기입니다. 사도는 고용주에게는 관용을, 아랫사람들에게는 인내를 권고하는 장면이, 지금껏 유지되는 것이 서글프고 안타깝지만, 우리들은 고쳐야 할 숙제입니다.
3. 김장을 하려고 아산에 내려왔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묵상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을 즐길 이유. / 벧전 4:7-19. (0) | 2019.05.27 |
---|---|
믿으면 구원받는다. / 벧전 3:13-4:6. (0) | 2019.05.27 |
도대체 산 돌이란 무엇이며 어떤 삶입니까? / 벧전 2:1-10. (0) | 2019.05.27 |
구별된(거룩한) 삶을 살라 하십니다. / 벧전 1:13-25. (0) | 2019.05.27 |
고난 가운데 산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신다. / 벧전 1:1-12. (0) | 2019.05.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