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023호(2020. 8. 8. 토요일).
시편 98:1-3.
찬송 521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엄마께> 엄마 편지 잘 읽었습니다. 결혼이 무슨 보험 상품 고르는 거냐고 따졌던 건, 제가 좀 심했어요. 우선 그것부터 사과할게요. 그런데 엄마 그거 아시지요? 자신의 약점은 자기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다는 거. 그래서 난 여기가 좀 부족해, 이렇게 느끼면서 마음 졸이고 있는데, 누가 딱 거기부터 공격하고 나오면 말예요. 정말 견딜 수 없이 아파요. 차라리 내가 모르는 약점을 공격당해 쓰러지면 더 낫겠는데, 항상 다 알고도 어찌해 볼 수가 없는 딱 그곳부터 공격당하니까 더 기가 막히는 거죠. 제가 언젠가 선미 얘기를 했었지요. 결혼 허락받으러 처음 그 남자 부모님 댁에 가서 있었던 일. 엄마가 늘 경우 바르고 밝고 예뻐서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선미에게도,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었지요. 바로 키였어요. 늘 키가 조금만 더 컸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었어요. 그런데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남자의 어머니가 그러시더래요. “키가 좀 작구나. 키는 유전이라는데.” 물론 결혼한 지금은 좋은 고부사이로 지내지만, 그날 전화하면서 선미가 꺼이꺼이 울었었다고요. 명수씨에게 우리 집 가자고. 우리 엄마에게 맛있는 것 해달라고 하자고, 사실 그 전부터 몇 번 졸랐었어요. 전 허락부터 받고 사귀고 싶었으니까요. 그럴 때마다 명수씨가 자꾸 망설이더라고요. 처음에는 그저 가볍게 사귀고 말자는 뜻으로 해석하고는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었어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자기가 아직 내 세울 것이 하나도 없어서 그렇다고, 어느 부모가 이렇게 불확실한 남자와 자기 달이 사귀는 것을 좋아하겠냐고.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더군요. 그런데 엄마는 빙빙 둘러 묻긴 했지만, 결국 명수씨가 가장 마음 졸이는 그 부분들부터 건드려서 그 사람을 불편하게 하시더라고요. 제가 속이 상했던 대목은 바로 그것이에요. 엄마. 저희도 당장 한두 달 안에 결혼을 할 생각은 없어요. 1,2년 기다릴 거고, 그 사람도 그것을 목표로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쓰다 보니 또 제 불만만 잔뜩 늘어놓은 것 같아 죄송해요. 그렇지만 엄마도 아시지 않아요. 그 사람 마음이 아프면 제 마음은 두 배로 더 아프다는 것 말이 예요. 그러니 엄마 딸의 안목을 믿고, 좀 더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주세요. 네? <KBS FM 1, 노래의 날개 위에, 2008년 7월 4일 방송> b.
2. “권위에 대한 복종(1-7절)”을 읽었습니다. 과학 문명 시대의 특징 중 하나는, 나이가 많다거나 상사(上司)라고 해서 무조건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수천 년 동안 사회적 질서를 유지해 오던 권위가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는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모든 정권에서 이 권위의 문제를 아전인수식으로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1974년 11월 9일 당시 <김종필 국무총리는 위한 기도회>에서, 김 총리는 오늘의 본문을 거론하면서 현재의 정부 권위에 복종하라고 노골적으로 교회를 압박하였습니다. 지금도 우리 강단에서는 이 권위의 문제를 해석할 때마다 오늘의 본문을 금과옥조처럼 생각하며 문자적으로 인용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불의한 권력과 권위에도 복종해야 하는가?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올바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의 어리석음은 우리의 언어생활을 살피면 자명한 일입니다. 모든 말과 글이란 그 독특한 배경을 먼저 이해할 선행(先行)과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거대한 쓰나미처럼 세상을 집어 삼키려고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세상 물결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바로 로마제국의 힘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정권을 유지하고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적어도 로마 제국주의에 항거하지 않는 수준에서 일반 종교들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가혹하리만큼 잔인한 처형을 감행했던 것입니다. 그 한 예가 로마 콜로세움 광장에서 기독교인들을 사자의 밥으로 내 놓은 일입니다. 이런 위기에 사도는 원론적인 얘기를 했던 것입니다. 부모나 스승 그리고 지도자의 권위에 따르는 것은 어쩌면 기본적인 질서 유지행위였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권위는 헬라어로 엑수시아인데,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단어는 지도자라고 해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를 둔 정의로운 권위라는 단서가 붙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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