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7(2000.12.14, 목요일)
성경말씀 : 벧전 1:7-9.
찬송 : 395장.
제목 : 불로 연단 된 믿음이 필요하다.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 묵상할 말씀은 표준 새번역이 훨씬 의미가 분명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서 순수하게 되면, 불로 연단하여도 마침내는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더 귀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이 칭찬과 영광과 명예를 차지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연단을 받는 두 가지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금입니다. 믿음과 금이 공통적인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믿음도 금도 연단을 받아야만 이 제 값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순도가 높은 금을 얻기 위해서 뜨거운 풀무를 통과해야 한다는데 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믿음 역시 그런 뜨거운 풀무를 거쳐가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의외인 것처럼 생각할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나,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어떤 특권을 가진 사람처럼 여겨질 수 있는데 말입니다. 불신의 바다에서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이나, 세상의 주인 되심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가상하기 짝이 없는 칭찬 들어 마땅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뜨거운 풀무 불에 연단까지 필요하느냐고 말입니다.
3. 예수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을 때 구원받는다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 안팎으로 오해가 많은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 기독교인들은 아무런 고생도, 노력도, 업적도, 공로도 없이 그저 믿는 마음 하나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인 자신들도 믿음이란 육신적인 활동과는 무관한 마음의 한 상태 정도로 이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식에 대해 갖는 기대와 믿음처럼 막연하지만 의지하는 마음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필요할 때는 주여, 주여 하다가도, 어떤 때는 그 주님에 대해서 얼마나 무관심한지 모릅니다. 거기다가 그저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그 믿음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그런 값싸고 무책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위해서 행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는 일을 의미합니다. 가령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을 인도하라.” 모세는 불붙는 가시떨기 나무의 놀라운 장면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인 이집트의 바로와 맞서도록 명령하십니다. 자칭 신이라고 생각하는 권력자에게 한 젊은 살인자 모세가 나서서 겨룬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과 그 말씀의 신실함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태산같아 보이는 바로의 권위에 도전하게 됩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할 때만,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계시며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을 믿었습니다. 언뜻 보아서 이런 믿음은 사람들의 눈에는 상식을 벗어난 무모한 짓이며, 목숨을 내놓을 수도 있는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아침저녁으로 바꿀 수 있는 변덕스런 인간의 마음 상태도 아니고, 한 순간에도 이리 저리 흔들릴 수 있는 감정은 더욱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손해를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던질 수 있는,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위대한 결단이며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는 다니엘이라는 소년을 기억합니다. 그의 친구 3명과 함께 불 속에 던져진 사람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과 땅의 왕의 명령에 따르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택함으로, 불 속으로 던져졌습니다. 믿음은 불로 연단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믿음이 산을 옮기는 능력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사람의 결단이나 각오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들의 삶에 모셔들이는 가장 지혜로운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저는 이 히브리서 11장 1절을 실제로 삶에서 분명히 경험하였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공부만 10년을 했었다는 말씀을 기억하고 계신지요? 26살에 대학엘 들어갔으니까요. 그 동안 저는 오직 대학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수 차례의 시험을 차례로 낙방하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신앙은 분명하였습니다. 바로 이 구절 때문이었지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제 나름대로 이 말씀을 해석하기를 “믿음의 눈으로 나의 앞날의 내 모습을 바로 내 눈앞에 당겨다 놓고 사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청색 대학생 교복과 대학 모자를 쓰고 주일학생들 앞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적극적인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에서 이미 잘 설명하고 있는 평범한 해석입니다만, 이런 믿음은 하나의 마음상태만은 아니라, 행동을 구체화하게 하는 힘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지금은 훨씬 더 신학적인 뒷받침이 생겼습니다. 우리게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미래를 생생하게 내다볼수록 허락하고 계신다는 것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믿음이란 아직 이루지 못한 꿈이 아니라, 이루어질 꿈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승리의 삶을 저 멀리 바라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의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5.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초라한 자기 자신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배후에 있는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의 팔에 붙잡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는 말을 사용할 때에는, “나는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후견인입니다.”는 뜻을 마음에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이 믿음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겨야 하고, 이 믿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고와 고통도 기쁨으로 감수해야 할 것입니다. 잠깐동안의 묵상시간에 기독교 믿음을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인지는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일학교 교사 직분을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남편감을 허락하신다고 믿는다.” 이 말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기독교 믿음이 아니고, 일반 종교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신앙인에게 있어서 이 말은 신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신념과 하나님의 의지나 뜻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자신의 계획이나 의지 꿈 등을 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선하신 처분에만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처럼 말입니다. 적과 싸우기 위해서 자원한 젊은이가 3만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1만 명을 추리게 했고, 마침내 300명의 군사만으로 미디안의 12만 명과 싸우라고 하실 때, 믿음의 사람 기드온은 “예, 제가 그리하겠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6. 오늘도 믿음의 사람으로 연단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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