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68(2000.12.15, 금요일)
성경말씀 : 벧전 1:10-12.
찬송 : 175장.
제목 : 성령의 도우심을 기도하자.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길을 예언해 주었던, 선지자들 혹은 예언자들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의 신앙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형성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부모님에게서 영향을 받기도 하고, 친구나 문서를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다 더 근본적인 면에서 도움을 준 분들이 계십니다. 그들은 바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직 간접으로 참여하고 있는 선지자들 또는 예언자들입니다. 그들 역시 구원의 길을 추구하며 연구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실 구원의 전 과정에 대해서 예언하였는데, 이런 일을 가능케 한 것을 그들 속에 계신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그들을 움직이셨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고, 증거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저런 사람들에 의해서 선포되었지만, 그 배후에서 그들을 움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이것을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요한복음 20:31). 

3. 예언자들 역시 세상을 살아갔던 인간이었습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안고서 삶의 무게를 느끼던 사람이었습니다. 처음에 그들 역시 자신을 위해서 구원의 길을 찾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지런히 구원의 길을 연구하고 살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들은 자신들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는 그런 공적 인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12절 상반절). 자신의 구원도 소중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구원 역시 소중하다는 깨달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초점의 변화, 나에서 다른 사람으로, 이것은 천지개벽과 맞먹는 엄청난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 때문에 그들은 예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가능케 한 것은 그들 자신의 성품이나 인격에서가 아니라, 그들 중심에 계셨던 성령님의 활동이었습니다. 성령님을 모신 사람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특징입니다. 

4.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성령님에 대한 이해처럼 복잡한 것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 때마다 왜 초대 교회 이래로 기독교회가 가장 많은 연구와 노력을 기우린 것이 삼위일체 교리였는가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조주시며 세상을 주관하시는 성부 하나님, 사람으로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성자 예수님,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 감화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교리 말입니다. 우리는 세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이신 하나님을 각 위별로 교제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당신의 뜻과 의지대로 주관하시는 성부 하나님을 따로 떼어놓고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세주 예수님을 떼어놓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성령님을 만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삼위이시며 일체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균형 잡힌 하나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신앙생활이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의 어느 장로교회는 성부 하나님만을 강조한 일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교파에서는 성자 예수님만을 더 많이 강조하기도 하였고, 마찬가지로 또 어떤 이들은 성령 하나님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을 말할 때에도 거기엔 성자 예수님과 성령님이 함께 하심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성령님을 고백할 때에도 거기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고 있어야 하겠습니다. 

5. 그러므로 우리들을 위해 예언하였던 예언자들 속에서 도우셨던 성령님은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성령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우리들을 돕기를 원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입니다(요16:13, 롬8:26, 빌1:19). 그러나 문제는 성령님이 무관심이나 멀리 계심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기를 원하시는 성령님을 우리들이 반갑게 모셔들이지 않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우리를 권고하고 격려할 기회조차도 드리지 않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오신 성령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이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도 어려운 일은 성령님을 모셔들이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비우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에 가득차 있는 잡동사니들, 수많은 꿈과 계획과 야망과 생각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송두리체 쓸어내어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전히 신앙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의 의지와 뜻을 우선적으로 내세우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이하게도 성령께서는 잡동사니로 가득찬 복잡한 마음속에는 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릴 기도 제목은 “성령님을 내 마음에 모실 수 있도록 나를 겸손케 하소서!”가 어떨는지요? 성령님만이 여러분을 아름답고 따뜻한 삶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6. 고어 후보가 승복하였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다시는 번복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말도 덧 붙였습니다. 33만 7천 여표를 앞서고도 지는 우리에게는 희한한 선거인단 제도를 가진 미국 대선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사이비 정당이 들어설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해서, 각 주가 크기와 힘에 상관없이 동등하게 중앙 정부로부터 관심을 갖고 협력하도록 하기 위해서 선거인단 제도가 필요했다는 설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지배하는 것만이 아니구나 하는 새로운 생각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천사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시겠지요?  주안에서 유익한 하루가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김호경 선생님께.

찬미 예수 !

보내 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이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 비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인 때문입니다. 신앙을 고백을 하고, 찬송을 부르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주인은 내 자신이기에 말입니다. 어떤 분이 절간의 객사에서 몇 일을 묵고 나서 그 때의 느낌을 글로 쓴 것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소개해 준 방에 들어 갔는데, 옷을 걸어둘 못 하나가 벽에 박혀있을 뿐 아무 것도 없는 빈 방이었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너무 쓸쓸하고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의 마음에 가득차오는 기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속세에서 그를 애태우고 걱정하게 하였던 얽히고 섥힌 생각들이 다 빠져나간 뒤의 기쁨이었는지, 아니면 더 이상 아무 것도 가질 필요가 없는 단순한 삶이 그가 진심으로 바래왔던 삶이었다는 깨달음에서 온 기쁨이었는지는 모릅니다.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가진 생각이나 꿈을 최고의 것으로 붙잡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서 뺏기는 것은 아닐까해서 잠시 잠간 동안에도 놓지지 않으려고 단단히 붙들고 가슴졸이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물론 주님을 마음에 모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대로 사는 것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생각을 하는 것과 결심이라는 차원에 머무는 것으로 만족하는 경향성이 많은게 사실입니다. 가령 은혜로운 예배를 드린 것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이며, 기도원에서 받은 충만한 은혜 자체로 만족하는 경우가 그것들이라 하겠습니다. 다행히도 김선생은 생각한대로 살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에 대해서 지금 묻고 있습니다. 아무리 다짐을 하고 최선을 다해 보아도 되돌아 보는 삶은 후회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 육신을 가진 우리들의 한계점이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싶지만, 동행하지 않은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모순되고 절망적인 우리입니까? 바울 사도를 예로 들면, 그 분 역시 우리가 느끼는 그런 갈등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7-8장에서 그런 모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점은, 우리의 변화된 생활이나 행실에서 희망의 요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가진 믿음에서 희망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4-25a).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이 구절들은 바울 사도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이제 해답을 찾아 봅시다. 첫째, “이만하면 나는 괜챦게 살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나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둘째, “나는 어쩌면 이렇게 어리석고 바보같이 살아갈까? 그러나 주님 안에서 더 나아질 희망은 없을까?”고 말하고 있는 내가 되었는지를 찾아 볼 것. 셋째, “나는 순간 순간 주님께 나를 의탁할 때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다.”고 자신을 격려하는 나를 만들어 갈 것.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우리의 마음속에 주님께서 온전히 왕노릇하시지 못할까를 염려합니다. 신앙의 선진들이 기도시간을 많이 가졌던 까닭이나, 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말씀을 배우려고 했던 이유를 알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그런 노력만이라도 해야 위안이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처럼 남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서도 버림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죄인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픈 마음이 행복한 마음이고, 죄인임을 고백할 때만이 의로워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교 준비에 들어가야 합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샬롬.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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