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2(2000.12.19, 화요일)
성경말씀 : 벧전 1:23.
찬송 : 203장.
제목 : 거듭난 생활.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2. 유대인의 관원(산헤드린 의회 의원)이었던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어떤 면에서는 충격이었습니다. 산헤드린 의회는 훗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결정하였던, 유대인의 종교생활과 전통에 대해서 가장 권위 있는 해석기관이며 재판소였습니다. 몇 되지 않은 이곳의 의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영생에 관해서 질문하였기 때문입니다. 우선 인간적인 면에서 니고데모가 나이로 보나 세상 경험이나 지위로 볼 때 예수님보다 위에 있었음에 분명하지만, 그는 삭게오처럼 자신에게 솔직한 자세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 본받을 만한 일입니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통받으면서도 아는 체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다음으로 그는 진리에 대해서 적극적인 구도자의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거듭남(Be born again)은 논리적인 용어가 아닙니다. 이것처럼 신앙적인 용어는 그리 흔치 않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잘 들어보십시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그렇습니다. 사람의 이성, 혹은 합리적 사고의 틀 안에서는 성령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어린아이의 생각은 어른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생각의 틀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성해서 아들 딸 낳고 인생의 맛을 조금 본 후에는 부모님의 사랑을 이해하게 될지 모릅니다. 철부지 학생이 어찌 그의 장래를 염려하며 초달하는 스승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사람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듭남의 진리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 거듭남의 진리는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의 말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요3:9-13).
4. 사람들은 현재보다 새로운 삶을 희망합니다.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어리석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불만스럽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도인 우리들에게서도 예외가 아닙니다.그러나 새로운 삶이란 어떤 결단이나 각오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성도가 새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옛 사람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주안에서 살아가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고후5:17). 너무도 많은 기독인들이 변화되지 않은 자기 모습 때문에 실망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의 마음 중심을 보려고 하지 않고, 바깥 모습에만 주목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기본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말해 버린 후에 후회하는 것보다는, 말하기 전에 자신을 살피는 것(한마디하기 전에 세 번 생각함)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기독인들 중에는 변화된 결과만 관심할 뿐, 변화의 삶을 구체적으로 돕고 있는 진행과정에 대해서는 진지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먼저 “주님,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 뜻이겠습니까?”라고 기도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을 진심으로 청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워진 모습을 증명이라도 하고싶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구나 품을 만한 욕심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나를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펼쳐질 결과가 아닙니다. 제가 기도원타입의 신앙인을 곱쟎게 보는 가장 큰 문제점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과에 대한 갈증으로 가득찬 기도생활을 하는 때문입니다. 너무도 갈급해서며 심각해서입니까? 여전히 시종여일하게 제 뜻대로 살겠다고 고집하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만나는 시련과 역경 또는 문제들은 신앙적인 면에서 볼 때,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모릅니다. 문자 그대로 시련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실패할 것 없는 자리에 서게 되었으니, 이제라도 제대로 된 기도를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입니까? 아버지께서 제게 요구하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제게 들려주십시오.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의 뜻대로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 한, 우리의 심령엔 평화가 찾아올 리 없을 것이며, 새로운 삶의 시작은 요원할 것입니다.
5. 거듭남의 삶은 어느 한 순간에 생각이나 목표가 완전히 뒤집어엎어지는 그런 현상이 아닙니다. 그렇게 신앙의 길을 걸어간 사람은 성경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세를 보세요. 바울을 보세요. 베드로를 보세요. 그들 역시 언제든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태위태한 신앙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시시 때때로 신앙과 불 신앙 사이에서 수 만가지 갈등을 겪으면서 고통을 당했지만, 그들이 예전 사람과 다르게 살았던 한 가지는,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앙이며,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을 때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다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은 어느 순간부터 동일하게 지속되는 종교현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고자 할 때만 나타나는 축복의 원리입니다. 부모님에 대해서, 장래에 대해서, 심지어 신앙에 대해서까지도 주님께 의탁하는 순간 순간만이, 거듭남의 삶을 경험하는 시간인 셈입니다. 그 밖의 모든 시간은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루터는 십자 성호 긋기를 강조했습니다. 그 상징을 사용함으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머무르도록 도와주기 때문이었습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주권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그 순간뿐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마다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주장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신앙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화살 기도라는 것을 가르친 일이 있습니다. 전도하러 나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도만이 아닙니다. 일마다 때마다 “주님 어떻게 할까요?” 이런 기도로 나아가는 것, 그 때 여러분은 거듭난 새 사람으로 분명 향기 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6. 지난 여름 우리 교회를 위해서 수고해 준 두 분이 계셨습니다. 교회는 그 분들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었는데, 한 분은 극구 사양하셨습니다. 내민 손을 다시 거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새삼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사양하셨던 분이 한 자원봉사단체를 소개해 주셨고, 그 분들에게 제 손을 내밀었습니다. 어제 전화를 통해서, “지난 여름 뜨거운 복날 오후에 장애자 30명에게 제대로 차린 삼계탕을 대접할 수 있었는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며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았습니다. 그 분들은 매 주 한 차례 밑반찬을 준비, 재택(집안에서 꼼짝 않고 있는) 노인 장애자들을 방문합니다. 말벗도 되어 드리고 청소도 해 드리며, 필요할 때는 바깥 나들이도 도와주는 선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우리 동네에 이런 젊은 부인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기쁘고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우리 교회도 이 분들을 힘껏 돕고 싶은 생각입니다. 마리아회나 루디아회 그리고 바울회도 관심을 가져 주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열매맺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신앙 때문에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이 맺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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