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883호(2022. 12. 16. 금요일).
시편 시 110:4-7.
찬송 507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최근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한참을 읽다가 한 가지 의문이 생기더군요. 사람은 자신에게 정말로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운명으로 일생을 살아간다고, 책의 내용은 말하고 있습니다. 필요한 것을 알지 못해 스스로를 걱정할 때, 가장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기 때문에, 사람은 스스로 불행해 지는 거라고 말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의문 속에 소설의 제목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대답이 들어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했지요. 자신이나 가족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만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교감 연민 배려로 사는 것만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오래전 읽었던 책을 통해서, 톨스토이가 남긴 깨달음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봅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7년 12월 16일 방송>
2. “앗수르를 벌하시는 야훼의 손길(5-19절)”을 읽었습니다. 보통의 부모라면 자식이 누군가 다른 아이와 싸웠다고 하면 일단 누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를 따질 때, 먼저 다른 아이에게 화가 나 있어야 하고, 또 나무라기도 할 텐데,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를 먼저 벌하시고 그 다음에 남의 자녀를 벌하시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공자의 가르침대로 수신제가의 본을 보이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사랑의 척도를 가늠케 하는 단면이라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를 사랑과 미움의 관계라고 말하는데, 실제로 십계명을 해설하면서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출 20:5)이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미움과 질투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미워할 일도, 질투할 이유도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을 고통스럽게 만든 앗수르는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본래부터 앗수르는 하나님의 분노의 지팡이요 징벌의 몽둥이었는데, 그들을 하나님의 치리하는 도구로 부르신 것은 맞지만, 몇 대 따끔하게 때리라고 했더니 엉뚱하게도 모조리 털고 마구 빼앗았다고 말입니다. 길바닥의 진흙처럼 밟아주라 했더니 엉뚱한 생각을 품고 닥치는 대로 쳐부쉈다고 말입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자신들의 장수들은 모두 왕이라 할 만하다며, 갈로와 하맛 사마리아도 망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도 같은 운명이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교만이 하늘 끝에 닿은 것입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대듯, 앗수르는 제힘과 제 지혜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남의 재물을 가로채 부유해 진 것입니다. 톱이 톱질하는 사람 앞에서 잘난 체 하고, 지팡이가 지팡이를 들고 있는 사람을 움직이기나 하듯 하나님을 조롱하였으니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이 건강하다고 자랑하는 몸을 수척하게 하고, 그들의 몸과 넋을 다 시들게 하며 병자가 숨을 몰아쉬며 죽어가듯 하게 하시겠다 하십니다. 그들이 자랑하는 모든 재물은 한 톨 남김없이 화염 속에서 태워 없어지게 하시겠다 하십니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하루아침에 사르듯, 그들의 우거진 숲과 무성한 과수원도 다 태워버리시겠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들이 일궈 놓고 자랑하는 모든 영화를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된 위인들이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가난하고 힘든 삶을 짊어진 사람들을 대변하고 도와줄 것으로 기대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 버릇은 개 주지 못했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 고착화 되었던 전제 군주제를 공화정으로 만들어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자들은 스스로를 황제이며 신이라 섬기게 하는 카이사르를 비롯해서, 인민의 공복이 되겠노라 혁명을 일으켜 지지를 받았던 레닌과 스탈린은 철권 통치자로 변모했으며,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통치자들이 권력만 잡으면 상식과 법치를 무시하는 포악한 군주로 바뀌는 것을 수도 없이 바라봐야 했으니 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이런 대표적인 인물이 초대 왕 사울이었습니다. 그의 처음과 나중이 얼마나 다른지를 타산지석으로 삼을 일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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