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7900호(2023. 1. 2. 월요일).
시편 시 115:16-18.
찬송 235장.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몇 해 전 한 신문사에 작곡가 또 성악가 100명을 대상으로, 최고의 우리 가곡과 작곡가를 선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가장 많은 작품을 추천받고, 최고의 작곡가로 손꼽힌 영광을 동시에 누린 이가, 작곡가 김동진이었지요. 최고의 다양성을 지닌 작곡가, 낭만 가곡의 대표자, 예술가곡으로 현대와의 다리를 놓아 준 작곡가. 그의 이름 앞에는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그의 작품들만큼이나 많은 수식어가 붙기도 했습니다. 목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유년기부터 쉽게 서양음악을 접하고,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했던 그는, 성악적인 기량이 돋보이는 그러한 가곡을 많이 만들어 왔습니다. 김동진의 대표작 가운데 <수선화> 소개합니다.
“그대는 차디찬 의지의 날개로, 끝없는 고독의 위를 나는 애달픈 마음. 또한 그리고 그리다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또 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가여운 넋은 아닐까? 붙일 곳 없는 정열을 가슴에 깊이 감춰지고 찬바람에 쓸쓸히 웃는 적막한 얼굴이여, 그대는 신의 창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명의 소곡,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 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도 그대를 따라 저 눈길을 걸으리.”
김동진은 <내 마음>, <수선화 >와 같은 김동명의 시에 곡을 붙여 우리 가곡 사에 길이 남을 명곡을 완성했습니다. 시인 김동명은 김동진이 유성 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은사였지요.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김동명의 시상과 김동진의 음악성은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시인의 고향인 강릉 경포주변을 산책하다보면, 바로 수선화의 시비를 만나게 되지요. 쓸쓸하고 고즈넉한 시의 서정이 호수의 풍경과 잘 어우러집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년 1월 2일 방송>
2.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다(1-7절)”을 읽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타 민족과는 다르게 선민의식(選民意識)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민족 외에는 다른 모든 민족을 이방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유일한 민족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자부심은 그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였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게르만 민족과의 사이에 벌어진 우세종(優勢種)의 싸움이었고, 세계 2차 대전에서의 6백만 명이 학살되는 대참사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는 성경말씀에 대한 곡해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의 선민의식의 출발점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히브리 족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이주케 하시고, 그들로 큰 민족을 이룰 것과 이름을 떨치게 할 복을 주시겠다 약속하시고, 그들에게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주고,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 하실 뿐 아니라, 그들 민족의 이름은 다른 사람에게 복을 끼쳐주는 이름이 되고, 덕을 입히는 이름이 될 것이라고 약속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모든 성경말씀과 같이 한 두 구절만 떼어내 해석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맥락에서 소위 통전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그의 자손들을 선민이 되게 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은,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나누어주고, 덕을 입히려는 원대한 목적에서 부르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유대 민족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염두에 두시고 선택하시고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자의적(恣意的)인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어느 유명 설교가는 “그리고”라거나, “ㄹ지라도” 같은 접속사나 조사를 자신의 설교 제목으로 삼은 것을 보고 아연실색한 일이 있었습니다. 설교의 중심점을 대변하는 제목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성경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중(意中)을 충실하게 전달할 의무와 책임이 있을 뿐, 제 멋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의적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어느 특정인을 선택하시거나(구약) 부르시거나(신약) 할 때는, 그 한 사람만을 우대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훨씬 더 크고 넓은 의미를 가진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해석이 바람직하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본문이 바로 오늘의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가령 이 본문을 가지고 제가 어린 아이들을 제단 앞으로 불러 모아 짧은 설교를 한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얘들아,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단다. 아브람아, 나는 네게 좋은 것들을 많이 주고 싶단다. 그러면 너는 내가 너에게 준 이 좋은 것들을 옆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렴.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단다. ‘이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우리가 서로 사이좋게 재미있게 놀라고 하신 것이야.’ 그렇게 할 수 있겠니?” 라고 말입니다. 청자(聽者)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러나 성경의 중심주제는 반드시 선포하면서 말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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