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161(2023. 9. 20. 수요일).

시편 시 19:1-4.

찬송 457.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살면서 누구나 수차례 고비들을 만나곤 하지요. 그 때마다 넘어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또 길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짧지 않았던 세월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왔던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내는 것처럼 말이지요. 어떤 순간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가장 힘든 순간에도 하나의 단어를 머릿속에 떠올리곤 합니다. “어머니라는 단어지요.

    “어머니와 정답게 거닐었던 그 들녘, 그 들녘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네. 세월이 가도 그 미소 잃지 않는 어머니. 바람 불면 그 향기 내 곁을 떠나갈까? 지난 일을 돌이켜 고운 꽃 길 걸으며, 불러보는 어머니를 언제 다시 만날까? 어머니와 정답게 거닐었던 그 들녘. 어머니와 예처럼 살고 싶네. 어머니와 정답게 거닐었던 그 들녘. 그 들녘을 나 홀로 걸어가고 있네. 언제 봐도 그 미소 잃지 않는 야생화, 바람이 불어도 떠나지 않는 향기. 그 향기에 취하여 걱정근심 놓고, 눈 마주치던 어머니는 어디로 떠났을까? 어머니와 정답게 거닐었던 그 들녘. 어머니와 예처럼 살고 싶네.”

    누군가가 말을 했습니다. “이제껏 살아오면서 받았던 사랑 모두와 어머니의 사랑을 저울에 올려도, 저울은 어머니의 사랑 쪽으로 기운다.”고 말이지요. 신이 이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만든 것이 바로 어머니라 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서로 다르게 살아온 여러 사람들을 하나의 이름아래 같은 마음으로 모이게 한다면, 그것은 아마 어머니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그 이름을 떠 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먹먹해지고 나서야, 우리는 지난 시간들을 후회하곤 하지요. 너무 많이 늦은 것은 아니기를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하오기 시 김동환 곡 <지금도 그 들녘에는> 이었습니다. <KBS FM 1, 정다운 가곡, 2008917일 방송>

 

2. “빌라도의 심문(1-5)”사형 판결을 받으신 예수(6-15)”을 읽었습니다. 오늘 묵상은 둘째 단락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에서 사도신경(혹은 사도 신조)를 고백합니다. 대부분이 눈을 감고 줄줄 외우곤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앙고백 속에 빌라도라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본디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본디오 빌라도는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려고도, 죽이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오히려 그가 재판석에 앉았을 때 그의 아내가 보낸 사람을 통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왔나이다.”(27:19)는 전갈을 받은 일이며, 예수를 심문한 후 고소자인 유대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18:38)고 밝힌 점이나, 또 다시 내가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너희도 이제 보면 알 것이다.”(19:4)고 말미를 준 점, 그리고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중략>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 이다.”(19:12)로 하마터면 빌라도가 탄핵을 당할 위기까지 몰렸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법치주의를 표방하는 로마 제국의 관리로써 해서는 안 되는 정치적인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빌라도가 지난 2천년이란 길고 긴 세월동안, 수십억 명의 크리스천들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로 예상되는 문제는 그의 재판과정이 불법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는 물론 요한복음서까지 합세해서 예수님의 재판을 보도하고 있는데, 그의 재판은 자신의 아내까지 등장하는 등 온정주의는 있을 지언정 불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소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사칭한 무서운 죄를 저질렀다 밝히는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유대인들의 분노를 잠재우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문제를 법정에까지 가져오는 과정에는 분노라는 것이 큰 몫을 차지한다 합니다. 유대교인들에게 예수는 미운털이 박힐 대로 박힌 이단자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강도로 옥에 갇힌 바라바라는 자를 내세워 예수를 풀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흔히 법치주의 국가에서 큰 명절에 죄수의 감형이나 복권을 시키는 오랜 관례를 따랐으니 치명적인 잘못일 수 없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상입니다. 빌라도는 입으로는 상식과 정의를 내세우는 법치주의자인척 코스프레를 했지만, 그것은 허울뿐인 립서비스로 끝났고, 스스로 법이론은 물론 양심마저 지키지 못한 무능한 기회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사람 바로 그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기회주의자, 신념과 지조는 물론 이미 양심까지 팔아먹은 사람, 우리가 친일 매국노들을 용서할 수 있어도 잊을 수는 없는 이유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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