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26(2024. 6. 11. 화요일).

시편 시 69:1-3.

찬송 410.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999년에 제정된 논픽션 도서상의 이름이 기포드(Gifford)상인데, 이 상의 본래 이름은 새뮤엘 존슨 상이었습니다. 새뮤엘 존슨은 옥스퍼드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가난으로 공부를 포기하고 시인과 평론가로 살면서, 근대 영어사전을 만들어 영문학의 발전을 도왔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많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끼친 한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희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필요하다.

희망이 있을 때 부르는 노래는 희망이 아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지고, 어둠과 절망만이 남아 있을 때, 희망을 노래하면 희망이 생겨난다. 쓰레기 더미에서 부르는 노래야 말로 진정한 희망의 노래, 생명의 노래이다.

     희망씨, 가슴에 새기는 한 줄 명언, p.288. 박성완, 24. 6. 9.

 

2. “예언자는 자신의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53-58)”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교회 지도자들과는 부딪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시대를 산다는 것은 참 답답하고 또 두려울 것이다. 그래서 주님을 그곳을 떠나 고향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의 궁시렁대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 사람은 목사의 아들이 아닌가? 그 에미는 마리아이고,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하는 잡소리들 말입니다. 제가 일찍 고향을 떠나 고등학교부터 그 이후의 공부를 타지에서 했기 때문에, 고향에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늘 그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까 특히 고향 교회들에게 뭔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그 구체적인 생각을 실천하였는데 고향을 지키는 목사님들에게 성경공부를 자비량으로 하고 싶어 본부에 제안을 하니까 교재비 500만원은 준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묵상식구들에게 광고하였고, 필요한 경비를(강사비는 강사들이 자비량으로, 숙식비와 운영비는 본부에서) 모급해서 가르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두 차례에 걸쳐 200여명이 모였는데, 저를 환영해 준 목사님은 휠체어를 타고 오신 목사님 한 분 뿐이었습니다. 우리 고향을 빛낸 자랑스러운 목사님이라고 말입니다.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그 힌트를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비로울 것이 없는 집안 내막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식구들이 어떤 라이프 히스토리를 갖고 있는지, 별의 별 사건들과 문제들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중에 떠도는 거짓말 같은 참말이 있는데 너무 알면 다쳐!”가 그것이었을까요? 이조년의 <다정가>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때는 고려 말기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전락해 버린 시절,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한 한 선비의 억하심정을, 그 마저 느끼지 못하는 인간에 비해, 한 밤중을 깨우는 소쩍새는 아는가 해서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동네의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큰소리친 것은 겉모습뿐이었습니다. 어찌 주님의 마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이조년의 형의 이름은 이억년, 그 위는 이만년, 그 위는 이천년, 맏이는 이백년이었습니다. 각설하고 공감과 연민이라는 마음으로 다가설 수 없다면 알아도 아는 게 아니고, 몰라도 모르는 게 아닐 것입니다.

 

3.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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