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자료 8496(2024. 8. 20. 화요일).

시편 78:30-33.

찬송 358.

 

1.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포크너는 인종차별을 그린 장편 <압살롬, 압살롬!>을 썼는데, 제명/題名은 근친상간으로 배다른 형을 죽인 다윗의 아들 압살롬(구약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흑인의 피가 섞인 아내를 버린 사토펜이 1833년 제퍼슨에서 대농장주가 되고, 지금의 아내에게서 헨리와 주디스를 얻는다. 어느 날 아들이 데리고 온 친구 본은 전처소생의 딸 주디스와의 결혼을 간청하고, 헨리는 본을 살해한다. 남북전쟁 후에 사토펜 일가는 몰락하고, 집은 불타버린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은 살만하면 그걸 누리지 못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가 남긴 명언으로는 남 보다 더 잘하려고 고민하지 마라. 지금의 나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향상이 가장 자랑스러운 제 모습일 테니까.

 

2. “사도들이 받은 두 번째 박해(27-42)”을 읽었습니다. 법원을 자주 드나드는 것은 생각보다는 참 힘든 일일 것입니다. 저도 매 주 한 차례씩 몇 달째 구치소에 있는 교우를 찾아 법원 구치소를 방문한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찾아갈 때는 길을 몰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인 양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기도 했습니다. 형이 확정될 때까지는 피의자의 인권이 보장된다는 법규는 시퍼렇게 살아 있지만, 사람들의 인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법원에서 무죄로 확정된 사람까지도 죄인 취급하는 우리 사회의 몹쓸 인식은 고쳐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산헤드린 앞에 불려선 사도들은 또 다시 엄중한 질책부터 들어야 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는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일어두었거늘 어쩌자고 당신들의 교를 퍼뜨리는 거요?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뒤집어씌울 작정이오?” 산헤드린 고위 당국자들은 그들의 입으로 자신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음을 자인한 셈이 되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라 하겠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고 병을 고치는 것을 자신들의 힘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던 것이며, 그렇게 된 원인 제공을 자신들이 했다는 것을 감추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가장 간단한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귀찮게 하는 무리들을 일벌백계, 곧 죽여 없앰으로 해결될 것으로 생각하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막아선 사람이 율법사중 실력파인 가브리엘로 훗날 바울의 스승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옛 고사를 일깨우며, 진리의 사람이 아니면 그들은 다 흩어질 것이니 걱정하지 말 것이며,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각이면 우리의 하는 일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되지 않겠소? 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한 것입니다. 그러니 매질을 해서 단단히 일러주고 방면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것, 우리가 평생 짊어지고 갈 과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고난과 시련은 어쩔 수 없거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인위적/人爲的이며 작위적/作爲的이라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스스로 고난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좋은 예가 지금도 진행 중인 전 경기도 지사 부인의 법카 사용의혹을 규명하겠다며 시행한 2018. 7-2021.9까지 129회에 걸친 압색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밝혀낸 것은 회식비 75,000여원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겪지 않아도 될 일이며, 못된 사람들에 의해서 자행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고난을 겪는다고 원망 불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공부도 안 한 영어 교과서를 읽게 한 선생님은, 해석을 요구하셨고, 더듬거리는 저를 세워두고 온갖 험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입니다. 일부러 중인환시/衆人環視 속에서 창피를 주시려는 지능적인 체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훗날 선생님은 남편과 함께 제가 목회하던 부산의 모 교회로 찾아오셨고, 예배를 함께 드렸습니다. 참 스승다운 스승이심을 졸업과 동시에 고백한 일이 있습니다. 같은 작위적 고난이라 할지라도 약이 되는 것도 있음을 배운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고난 받는 주인공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꼼꼼히 살펴보면 헛된 고난이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야가 자신의 고난을 한탄하며 하나님을 비웃듯 하는 대화가 한 줄 소개되고 있습니다(왕상 19:9-10).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사람이 너무 지극해서 하나님은 벌을 주신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해와 분노의 감정이 누그러질 때, 그게 원망할 일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사랑임을 깨닫게 되는 때문입니다.

 

3. 막내딸이 제 집으로 떠나갔습니다. 제 엄마와는 달리 내년에 또 보자.” 말미를 주었습니다. 아마 여러 날 그 아이들을 생각할 것 같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박성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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